◈한국문화순례◈/낙서문화권

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蔥叟 2017. 9. 25. 07:01

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치소지(治所地)의 주 고분군이다. 피장자(被葬者)는 대가야의 최고 지배자인 왕을 위시하여 치소지에 살았던 유력층과 일반 주민 및 멸망 후의 주민으로 판단된다. 고령 주산성의 서남쪽 주능선과 거기서 파생된 치소지 방향 및 그 뒤쪽으로 파생된 여러 능선과 사면에 봉토분 700여 기가 있고, 일대에는 약 1만여 기의 소형 석곽묘[돌덧널무덤]가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산의 서남쪽 산등성이와 산록을 중심으로 고아리 고분군 뒷산의 정상부까지 분포한다. 지산리에 있는 고분군은 지형상 국도를 기준으로 북쪽 고분군과 남쪽 고분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쪽 고분군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범위도 더 넓을 뿐 아니라 봉토분과 소형 석곽묘의 분포 밀도가 훨씬 더 높다. 한편, 시기적으로 늦은 횡구·횡혈식 석실분은 전체 분포 범위 중에서 주로 능선의 말단부나 하위 사면에 분포하며 일부는 주위에 다른 고분이 없이 단독으로 분포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의 매장 주체부는 할석으로 축조한 세장방형 수혈식 석실[구덩식 돌방]과 석곽이고, 이전의 목곽묘[덧널무덤]가 마지막 단계에서 도입되었다. 중·대형분의 대다수는 석실 옆에 부장곽 및 순장곽이 설치되었다. 부장곽은 석실과 평면 T자 형태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11자 형태로 나란하게 배치된 변화를 보인다. 순장곽은 대체로 고분의 규모가 클수록 많이 지닌 등차적 현상을 보인다. 순장이 사라지게 된 6세기 전반 무렵이 되면 배장곽(倍葬槨)이 크게 유행한다. 그리고 6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백제 지역의 횡구식 석실분[앞트기식 돌방무덤]과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소형분은 할석 또는 판석을 세워 벽체를 축조한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가 주류이며, 석곽 중에는 양 단벽의 한쪽에 칸막이를 세워 부장 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내부의 석관을 두면서 외부에 석곽을 축조하였다.

 

봉토분에는 호석을 갖추었는데, 형태는 약한 타원형을 이룬다. 축조 방식에는 수평식 성토 방식이 기본이며, 구획성토(區劃盛土)와 흙둑기법[土堤技法] 및 흙주머니쌓기[土囊築造]가 확인되기도 한다. 봉토분의 위치는 대개 5세기 전반부터 낮은 지형에서 시작하여 6세기 전반까지 높은 쪽으로 변한다. 그 뒤에 새로운 앞트기식 돌방과 횡혈식 석실[굴식 돌방]이 도입되면서 다시 낮은 쪽에 축조하는 추이를 보인다.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절상천전총은 평면 방형과 합장형 천장으로 이루어진 현실(玄室)[널방]과 긴 연도(羨道)[널길]가 달린 굴식 돌방무덤이다. 그 밖에 횡구식 석실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방형 또는 장방형 현실과 짧은 묘도를 갖추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고분 문화의 실체는 물론 삼국시대의 고분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문헌 기록으로만 알 수 있었던 순장이 가장 먼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대가야 특유의 순장곽과 대규모 순장, 그리고 고분 내 다양한 순장처에 관한 내용이 밝혀졌다. 또한 봉분의 축조 방식에 고대 토목 기술의 적용에 관하여 가장 상세하게 밝혀져 고대의 기술사 부문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밝혀진 대가야 문물은 문화권 문제와 교류 등 고대사 복원에도 매우 중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2017.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