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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대가야 궁성지

蔥叟 2017. 9. 23. 06:56

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대가야 궁성지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간 16대 왕이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궁성지가 어디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령현 고적조에 '현의 남쪽 1리에 대가야국의 궁궐터가 있고 그 옆에 돌우물이 있는데 어정(御井)이라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고령지'(高靈誌)에 '읍지 내에 어정이라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남쪽 1리에 있는데 바로 궁궐터로 전한다. 하나는 관아 북쪽 활 한마당 거리에 있는 '동부'의 동쪽이다. 이것도 대가야왕식정이라 전한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왕정은 현재 고령초교 운동장에 있으며 고령군이 보존하고 있다. 또 고령여자종합고교 담장쪽에 부근 마을 주민들의 음료수로 사용되던 독샘이라 전하는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왕정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고령초교에서 해방 후 학교 운동장 조성시 지름 1.2m의 기다란 주춧돌 몇 개와 호박돌 등을 발견됐고, 당시 연세대 사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했으며, 조사를 주도한 홍의석 교수가 고령초교 부지 주변이 대가야 궁궐터라는 기록을 연세대 학보에 낸 적이 있다. 당시에 출토된 돌들은 학교 서편 산자락에 공원을 조성해 보존했으나 이 후 6.25사변때 폭격으로 안타깝게도 모두 파괴됐다고 한다. 또 고령초교 주변을 연조(延詔)리, 또 연조리 남쪽 방향에 헌문(軒門)리 등 관아로 추정되는 지명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뤄 부근에서 예부터 궁성지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분석이다. '동부'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연조리 동쪽방향 '동배마을'을 칭하고 있어, 대가야 궁성지는 고령초교를 중심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우물인 구신정(九臣井)이 고령읍 연조리 향교터 밑에 자리잡아, 그것도 왕궁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궁성지가 520년 간 한 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유력한 궁성지 중 한 곳이 바로 고령초교에서 옛 고령군청 일대일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추정되는 궁성지인 고령읍 연조리 일대는 인구 밀집지역이어서 앞으로 재개발 등 특별한 변화 없이는 궁성지 발굴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대가야의 궁성지로 추정되어온 대가야읍 연조리 일원에서 대가야시대의 궁성으로 추정되는 토성과 해자(垓子)가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연조리에서 주택신축을 위한 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매장문화재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표본조사 결과 대가야시대로 추정되는 해자 시설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정밀발굴조사 과정에서 대가야시대로 판단되는 해자시설과 그에 나란하게 연접하여 축조된 토성이 확인되어다.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대가야 국가의 행정 중심지인 궁성지가 처음으로 확인됨으로써 향후 대가야 역사문화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학술적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조사지역은 일제강점기로부터 대가야 궁성지로 추정되어온 구릉과 인접한 지역이다. 앞서 2000년에 고령군은 대가야 궁성지 확인을 위해 현재 고령향교가 위치하는 구릉 일대에 대해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궁궐 건물의 일부로 추정되는 대벽건물지 등의 유구를 확인하였으나 추가적인 확장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궁성으로 추정할 만한 유구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발굴조사에서 구릉 하단부를 따라 감아 도는 형태의 해자와 토성이 확인됨으로써 대가야 궁성의 실체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해자는 구릉의 경사면을 그대로 따라 내려오면서 굴착한 형태로서 현재 깊이 1.5m, 7m, 길이 16m 정도로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축조당시 토축 성벽의 상단부 높이를 감안하면 해자의 깊이와 폭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은 해자의 외측 가장자리를 따라 해자와 평행하게 석렬을 놓아 구획하고 그 외측으로 연접하여 축조하였다.

 

해자와 평행하게 배치된 3열의 석축은 2~2.5m 정도의 간격으로 줄지어 있으며 2~3단 정도 돌을 쌓았는데, 석렬 사이의 토층단면은 흙을 다져 판축한 양상을 보인다. 즉 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축조하였으며, 그 성토 단위는 2m 정도의 폭으로 돌로 구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확인되는 성벽 하단부의 폭은 5m 내외이며 조사구역 바깥으로 토성의 성토 범위가 이어지고 있어 성벽의 폭은 이보다 더 크다고 판단된다. 유물은 토성 축조과정에서 혼입된 것으로 판단되는 단경호와 토기편 등 대가야토기와 함께, 대가야 기와가 성벽 보강토 내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해자의 바닥 퇴적토 내에서도 길이 3m가 넘는 제재된 목재와 기와편, 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해자와 성벽의 축조시점과 폐기시점 규명은 물론, 지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교차편년을 통해 대가야의 토기의 편년문제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해자 및 토성 등의 유구는 대가야 국가의 행정적 중심지로 인식되어 온 대가야읍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고고학적 자료이다. 더욱이 이번 조사지역은 예로부터 대가야의 궁성지로 전해왔고, 2000년에는 대벽건물지까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이제 충분히 대가야의 궁성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죽은 자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지산동고분군(사적79), 유사시 피난하는 배후대피성인 주산성(사적61)에 더하여 그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궁성지가 확인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가야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아울러 학술적 자료 가치가 매우 높아 대가야의 역사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 밝혀진 기단부에 돌을 쌓고 판축상으로 뒷채움하는 토목건축 방식을 통하여, 백제나 신라의 궁성지 토성 축조방식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이번조사의 성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문헌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해오던 대가야 관련 기사를 실증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대가야멸망 관련기사에 등장하는 대가야의 궁성문인 전단량(栴檀梁)에서 ()”의 실체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축조 당시 추정되는 성벽의 규모를 감안할 때 해자의 폭은 10m가 넘는 규모로가 되는데, 이를 가로지르는 교량이자 성문으로 기능한 교량(들다리)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향후 궁성(성벽 및 해자)의 연장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대가야 궁성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대가야 궁성지

 

 

 

<2017.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