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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蔥叟 2017. 9. 22. 06:53

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최근 발굴 조사 결과 높이는 현 지표에서 340였음을 확인하였다. 원위치에서 70정도의 간격을 두고 원상대로 두 개의 지주가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양측의 모를 죽이고 가장자리에 너비 14의 세로띠를 양각하였다. 중앙에는 약간 넓은 세로띠를 조각하였고, 다시 그 중심에 세로로 능선(稜線)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앞뒤 양 측면에는 두 지주가 똑같이 너비 9~11의 외연선문을 돌려 하부는 지주를 따라 내려졌는데, 상부에는 안상 모양의 조각이 있다. 외측면의 상부는 33쯤 밑에서부터 104까지 양각된 넓은 띠처럼 약간 튀어나오게 돋을새김을 하였다. 꼭대기 부분은 뾰족한 형태이고,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꺾어져 3잔의 굴곡을 이루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하 두 군데에 간구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에는 장방형 간구를 뚫어서 간을 시설하였으며, 하부는 현재 지면에서 55높이의 내면에 장방형 구멍을 두 지주 내면에 마주보게 뚫어 간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무기단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당간을 받치는 간대석은 유실되었으나 간대석 받침돌은 남아 있다. 지주와 간대석 받침돌을 중심으로 지주를 다듬을 때 생긴 화강석과 자갈을 이용한 보강석이 깔려 있다. 전체 직경 780정도의 범위로 70~90정도 깊이로 파서 점토를 불 다짐한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당간지주를 지탱하도록 했다.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주변이 시가지화되어 원래의 절터 범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근래에 당간지주에서 모산골 방향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지산리 44-1번지 일대의 도시계획도로 개설 구간 발굴 조사에서 물산사(勿山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와편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에서 서쪽으로 형성된 모산골 골짜기 일대의 넓은 범위에 사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원의 이름이 물산사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물산사라는 사명에서 지산(池山)’, ‘못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간지주는 상하부의 크기가 거의 같아서 약간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 지주의 바깥 둘레 각 면에 띠를 둘러 장식한 수법이나 전체적인 형태 등으로 보아 훌륭한 조각 작품으로 여겨진다. 각 면의 치석과 조각 방법 등으로 미루어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인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3121일 보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당간지주 둘레에는 철책을 두르고 그 안에는 잔디를 심어 보호하고 있다.

 

당간지주란 절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서 돌이나 나무로 만드는데, 돌로 만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두 개의 당간지주 사이에는 전봇대 같은 긴 나무를 세우거나, 원통모양의 철통을 여러 개 포개어 높게 쌓아올려 당간(幢竿)을 만들고, 그 꼭대기는 용머리 등으로 장식하는데, 여기에 당()이라는 불교 깃발을 매단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신라가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이곳에 물산사라는 절을 세워,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 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2017.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