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 향기를 찾아서 -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최근 발굴 조사 결과 높이는 현 지표에서 340㎝였음을 확인하였다. 원위치에서 70㎝ 정도의 간격을 두고 원상대로 두 개의 지주가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양측의 모를 죽이고 가장자리에 너비 14㎝의 세로띠를 양각하였다. 중앙에는 약간 넓은 세로띠를 조각하였고, 다시 그 중심에 세로로 능선(稜線)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앞뒤 양 측면에는 두 지주가 똑같이 너비 9~11㎝의 외연선문을 돌려 하부는 지주를 따라 내려졌는데, 상부에는 안상 모양의 조각이 있다. 외측면의 상부는 33㎝쯤 밑에서부터 104㎝까지 양각된 넓은 띠처럼 약간 튀어나오게 돋을새김을 하였다. 꼭대기 부분은 뾰족한 형태이고,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꺾어져 3잔의 굴곡을 이루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하 두 군데에 간구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에는 장방형 간구를 뚫어서 간을 시설하였으며, 하부는 현재 지면에서 55㎝ 높이의 내면에 장방형 구멍을 두 지주 내면에 마주보게 뚫어 간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무기단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당간을 받치는 간대석은 유실되었으나 간대석 받침돌은 남아 있다. 지주와 간대석 받침돌을 중심으로 지주를 다듬을 때 생긴 화강석과 자갈을 이용한 보강석이 깔려 있다. 전체 직경 780㎝ 정도의 범위로 70~90㎝ 정도 깊이로 파서 점토를 불 다짐한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당간지주를 지탱하도록 했다.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주변이 시가지화되어 원래의 절터 범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근래에 당간지주에서 모산골 방향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지산리 44-1번지 일대의 도시계획도로 개설 구간 발굴 조사에서 ‘물산사(勿山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와편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에서 서쪽으로 형성된 모산골 골짜기 일대의 넓은 범위에 사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원의 이름이 물산사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물산사’라는 사명에서 ‘지산(池山)’, ‘못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간지주는 상하부의 크기가 거의 같아서 약간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 지주의 바깥 둘레 각 면에 띠를 둘러 장식한 수법이나 전체적인 형태 등으로 보아 훌륭한 조각 작품으로 여겨진다. 각 면의 치석과 조각 방법 등으로 미루어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인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당간지주 둘레에는 철책을 두르고 그 안에는 잔디를 심어 보호하고 있다.
당간지주란 절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서 돌이나 나무로 만드는데, 돌로 만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두 개의 당간지주 사이에는 전봇대 같은 긴 나무를 세우거나, 원통모양의 철통을 여러 개 포개어 높게 쌓아올려 당간(幢竿)을 만들고, 그 꼭대기는 용머리 등으로 장식하는데, 여기에 당(幢)이라는 불교 깃발을 매단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신라가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이곳에 물산사라는 절을 세워,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 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지산동 당간지주
<2017.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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