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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과 백일홍이 어우러진 원림 - 경주 서출지

蔥叟 2017. 8. 7. 09:28

연꽃과 백일홍이 어우러진 원림 - 경주 서출지

 

서출지는 동남산 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이다.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못둑에는 배롱나무가 만발하는 곳이다. 오랜 연륜을 자랑하던 배롱나무 한 그루가 그 수명을 다하고 새로 심은 나무들은 아직 어리다. 연꽃과 백일홍이 만발하는 7월말 8월초순이면 이곳은 사진작가들이나 그림 그리는 화가들이 작품 활동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서출지(書出池)라는 그 이름이 심상치 않게 들린다.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뜻이니 이곳에 전설이 없을 리 없지.

 

신라 21대 비처왕(毗處王·炤智王이라고도 함)때의 이야기이다. 즉위 10년 무진(488)에 왕이 천천정(天泉井)으로 거동하였더니 이때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말 탄 군사를 시켜 그 뒤를 밟아 좇아가 보게 하였다. 군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버렸다.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 마침 웬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와 편지를 올렸다.

 

편지 겉봉에 쓰여 있기를, "떼어보면 둘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고 하였다. 심부름 갔던 군사가 돌아와 편지를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에 두 사람이 죽을 바에는 편지를 떼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다. 점치는 관리가 아뢰어 말하기를, "두 사람이라는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라는 것은 임금님이외다" 고 하니 왕이 그럴 성싶어 떼어보니 편지 속에 "사금갑(射琴匣 : 거문고집을 활로 쏘라!)" 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대궐로 돌아가 거문고집을 보고 쏘니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불공드리는 중과 궁주(宮主)가 몰래 만나서 간통을 하고 있는 판이라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날, 첫 쥐날, 첫 말날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기하여 함부로 출입을 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을 까마귀의 기일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냈으니 지금까지 이 행사가 있다. 속담에 이를 달도라고 하니 이는 구슬프게 모든 일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편지가 나온 못을 서출지(書出池)하고 하였다.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

 

소지왕 10년(488)이면 명활산성에 옮겼던 왕궁을 다시 월성으로 이사한 해이다. 이 설화는 초기 불교를 받아들일 때의 사건으로 불교에 반대하는 사건 내지 불교를 박해하는 사건일 것이다. 신라불교는 북방 흉노계 불교인 고구려불교를 받아들였고, 백제의 경우 남방계인 동진으로 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고구려의 경우 불교 전래 시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으나 신라는 저항이 심했다. 따라서 불교가 공인되는 기간이 고구려에 비해 150여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桃李寺)에서 불교를 전하고 있으나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고, 소지왕 때에는 공주의 병을 고쳐준 대가로 왕실에서 어느 정도 불교를 수용하였지만 공식적인 불교공인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후 시행되었던 것이다. 즉 전래 후 공인에 이르기까지 150여년 간은 원시신앙 내지 토착신앙에서 부터의 사상이동이 용이하지 못했으며 기존의 사상체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약300년간 승려의 출가를 금지시켰다. 그것은 승려들이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탁발만 하고 승려가 세속의 왕에게 절을 하느냐 마느냐로 분쟁만 일어났다. 따라서 승려가 가정을 버리고 세속의 인연을 무시하고 충효도 무시하고 병역을 거부하며 탈세를 하게 된다는 이유로 출가를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하고 북방의 흉노족이 내려오자 한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북방계통의 불교가 들어옴으로서 비로소 불교가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불교공인 이전에도 일반에 불교가 있었으며, 신라불교는 스님들이 권력에 귀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정에 자문을 하는 북방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다분히 국가 불교 내지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서출지 연못 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있어 한껏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요당은 한쪽 다리는 땅 위에 다른 한쪽은 연못 안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서출지와 이요당의 모습은 마치 강릉 선교장의 방지(房池)와 활래정(活來亭)의 모습과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아마 선교장을 만들었던 이가 서출지를 보고 간 것이 틀림 없으리라. 이요당은 조선 현종 5년(1664) 임적(任勣)이 지은 정자다.

 

이요당이라는 당호는 '樂山樂水(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요당이 한쪽 다리는 연못 속에 나머지는 남산에 걸쳐 있는데서 유래한 멋진 이름이다. 《논어》의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라는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밝아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또한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그러한 것들을 즐기며 산다. 이에 비하여 어진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겨 그 중후함이 산과 같으므로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또 어진 사람은 대부분 고요한 성격이며, 집착하는 것이 없어 오래 산다는 것이다. 요산요수의 원래의 뜻은 이와 같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산수의 경치를 좋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공자는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조용하다며 동과 정의 대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수는 강이다. “장강은 쉬지 않고 도도히 흐르도다” 라고 하였듯이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 유동하는 것이 강이다. 지자는 그 머리의 기능이 이와 같아서 지모가 차례로 생겨나며 그칠 줄을 모른다. 그 진퇴도 세상의 동향에 따라 자재로이 변화한다. 이에 비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산과 같다고 하여 산은 부동의 상징이다. 인자는 이 세상의 동향에 초연하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꼿꼿이 지킬 뿐 조금도 동요치 않는다. 지자와 강, 인자와 산의 이미지와 꼭 들어맞다. “나는 젊었을 때 물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산을 바라보고 있어도 조금도 권태롭지 아니하다. 이것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인자의 영역에 가까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호 하나에도 이렇게 오묘한 뜻이 담겨 있어 더욱 정다워 보인다.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이요당

 

▲서출지 이요당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이요당

 

▲서출지 이요당

 

▲서출지 이요당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서출지 연꽃

 

 

 

<2017.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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