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영동태백문화권

양양 낙산사 홍련암

蔥叟 2017. 8. 3. 09:20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가 낙산사인 것은 홍련암이 있기 때문이다. 낙산사의 산내암자인 홍련암(紅蓮庵)은 역사적으로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된 암자로, 낙산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반드시 친견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뒤 목숨을 건 구도 끝에 마침내 백의관음(白衣觀音)을 친견한 성스러운 관음성지이다. 바닷가 절벽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아 어칸은 2분합의 여닫이문, 양쪽의 협칸은 1분합의 외닫이문을 달았다.

 

나무를 깍아만든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관음보살상은 화불(化佛)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손은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다. 이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작은 크기의 도명존자와 남순동자가 협시를 이루고 있다. 뒤에는 관음보살이 단독으로 그려진 후불탱이 걸려 있다. 관음(觀音)이란 "소리를 보는 것"으로 중생들이 고통받는 소리를 듣고 도와 준다는 뜻이다. 즉, 관음보살은 자비의 화신(化身)으로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영한 모습으로 나타나 구제하여 준다.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을 낙산이라 이름했다.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神將)의 시종들이 그를 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니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음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했다.

 

"좌상의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당에 불전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

 

법사가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는 즉시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줄을 알았다. 이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가지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떠났다.

 

그 후에 원효 법사가 뒤이어 와서 여기에 예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월경때 입었던 옷)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 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를 불러 말했다.

 

"제 (醍 -원문에 한글자가 빠져있음)화상은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문득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으므로 그제야 하까 만난 성녀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또 법사가 성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정취,조신조>

 

의상과 원효는 모두 신라불교에서 쌍벽을 이루는 큰인물인데 어떻게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고 원효는 만났으면서도 관음보살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못난 스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록은 후대에 의상을 추종하는 일파가 원효를 의도적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기록일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추고자 할 무렵의 신라 입장에서는 6두품 출신인 원효의 자율성보다는 진골귀족 출신인 의상의 질서체게를 옹호하는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효에게 향하는 민심을 의상에게 돌리기 위한 기록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누구를 편들거나 깎아내리려는 아니라 인간답게 다가오는 원효의 매력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런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는 것 또 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 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이런 만남이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다.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 편액

 

▲홍련암 관음굴

 

▲홍련암 관음굴

 

▲홍련암 관음굴

 

▲홍련암 관음굴

 

▲홍련암 관음보살

 

 

 

<201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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