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백제의 흔적 - 서울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은 백제가 서기 475년 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기기 전까지 도읍지였던 이곳 한강 유역에 만든 백제 초기 고분군이다. 백제 초기의 매장 풍습과 함께 당시의 문화.정치.사회 등에 관한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 석촌동 일대의 낮은 대지 위에는 1916년 당시 돌무지무덤 23기, 흙무덤 66기 등 모두 89기의 고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무덤은 개발로 인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1987년 복원할 당시에는 석촌동 적석총 제3호분과 제4호분의 2기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제3호분과 같이 왕릉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 반면, 소형 움무덤(토광묘)과 같이 일반관리나 서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섞여 있어, 시기를 달리하며 많은 무덤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 중 ·후반경부터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백제 지배 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 공주 천도(475)까지의 백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근처 방이동(芳荑洞)백제고분군과 가락동(可樂洞) 등지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석촌동 일대에는 널무덤 ·독무덤 등의 소형 고분이 계속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고분군 지역에는 3,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다. 그리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식 적석총은 한강 중류인 양평군 문호리에서도 보고되고 있는데 이들 한강 유역의 적석총이 백제 것이 아니라 고구려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으나 평양지구와 한강지구 사이가 적석총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한강 유역의 적석총들 역시 백제 건국자들과 관련시켜야 할 것이다.
석촌동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이다.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석촌동 제3호분은 서북쪽 부분의 적석반출(積石搬出)로 인하여 이미 극심하게 파괴되었고 또 기단부 주변과 분롱(墳壟) 정상부에 건축한 가옥에 의하여 조사상 제약을 받아 처음부터 온전치 못한 상황하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적석총의 전체 규모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음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조사한 부분은 현 분롱 정상부에서 볼 때 이 적석총 전체의 약 1/4 정도로 추정되는 서북쪽 파괴 부분이다. 조사한 파괴 부분도 이미 상당량의 적석이 반출되었고 유재(遺在) 적석도 그 대부분이 교란된 상태였다. 이러한 현상의 적석총이었으나 부분적 조사를 토대로 밝혀진 몇가지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지방과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자성강(慈城江) 하류 지역 및 시중군(時中郡) 독노강(禿魯江) 유역의 소위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적석총과 봉분 외형이 동일하며 그 축성 방법이 또한 흡사하다는 점이다. 즉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의 분롱 외형이 3∼5층의 단축적석총(段築積石塚)을 이루고 있음과 동일하게 이 제3호분도 또한 3층이 남아 있다. 축조 방법에 있어서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이 큼직한 절석을 변두리에다 한 번 깔고 거기에 강돌을 메워서 첫 기단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다 또다시 절석을 넣고 그 가운데를 돌로 메운 제3기단의 축조법은 자갈과 할석(割石)이라는 용재의 차이는 있으나 이 제3호분의 축조 방법과 거의 흡사하다고 하겠다.
둘째, 이 제3호분의 현 분롱 정상부에서 볼 때 조사된 서북쪽 파괴 부분은 전체의 1/4 정도에 해당된다고 생각되며 가옥이 들어서 있는 동남, 동북, 서남의 각 부분을 합치면 방형이라기보다는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長方形) 같이 보여 그 외형이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력묘자촌 제15호분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셋째, 출토 유물인 금제영락형(金製瓔珞形) 장식품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영락(金冠瓔珞)과 동일하나 관모 부속품으로 인정되는 다른 출토품이 없으니 금관영락과의 연관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벽화 고분인 평양역전(平壤驛前) 2실분 출토 유물 가운데에 이와 흡사한 장식품이 있고 고분의 구조 형식이 동일한 점으로 보아 고구려 계통의 어떤 장식품과 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넷째, 백제 초기의 이 지역 고분 양식은 가락동 제1, 2호분과 같은 봉토분과 제3호분, 제4호분과 같은 적석총이 병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락동 구릉 소재의 횡혈식 석실분과 더불어 초기 백제의 묘제는 고구려 계통이면서도 다양성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섯째, 제3호분 축조 연대의 추정인데 구조 양식은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의 계통을 이었다고 하겠으나 연대 추정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는 출토 유물이 전무에 가까우니 명확한 추정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인접 지역에 남아 있는 풍납리토성, 삼성동 토성, 몽촌토성, 백제 초기의 가옥잔구(家屋殘構) 등의 유적으로 보아 백제 초기 한성시대의 고분임이 틀림없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 성곽 축성시대로 잡고서 A.D. 3세기 중엽 전후로 보고자 한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한국 · 일본 등에서 고분의 출현 시기를 고대국가 형성시기로 보고 있고 문헌상으로도 백제의 건국을 3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백제 초기의 고분 2∼3기가 남아 있어 이런 고분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 보다 확실한 백제의 묘제가 규명될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 제3호분
<2017.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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