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백제의 흔적 - 서울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은 대부분 도굴되어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지만, 고분의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낮은 구릉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사방의 벽을 돌로 쌓아 올린 뒤 한쪽에 널길(羨道)을 내고 바깥을 흙으로 덮었다.
고분들이 발견된 주변지역이 백제 초기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고, 몽촌토성·풍납토성·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가락동고분군 등이 모두 백제의 유적들이라는 점을 들어 방이동고분 역시 백제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4호분·5호분·6호분 등에서 출토된 회청색경질토기인 굽다리접시[高杯]가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띠고 있고, 널길의 위치와 관대(棺臺)의 방향 등이 경주지역의 무덤들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을 쌓은 주인공들은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방이동고분은 백제와 신라간의 교류관계, 혹은 신라의 북진에 따른 한강유역 진출을 증명해 주는 유적지이다.
방이동 고분군은 구조면에서 석촌동의 적석총들과 판이하게 구별되는 석곽묘 내지는 유연도식(有羨道式) 석실묘이다. 석촌동의 적석총들이 평지에서 만들어진 데 반하여 방이동 석실묘들은 구릉에 축조되었다. 같은 지역내에 시대를 달리하는 고분들이 시대가 오랜 것이 구릉 높은 곳에, 시대가 늦은 것이 점점 낮은 곳에 만들어졌음이 주목된다. 또한 시대가 오랜 것은 소형 석곽이고 거기서 발전하여 대형 유연도식 석실로 변해 간다. 두향(頭向)도 처음에는 동향이었다가 나중에 북향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되며 석실 남벽에 연도(羨道)가 생긴다. 또 특색 있는 터널식 석실묘가 발견되었으며 그 석실내의 일부를 칸막이하여 부곽(副槨)으로 쓰여진 예가 발견되었다는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방이동의 석곽 · 석실묘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석촌동 적석총에 묻힌 사람들을 북에서 남하해 온 이주민들이라고 부른다면, 이 이주정복자들과는 출신 성분이 달랐던 사람들로 보아야 할 것 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곳에 따로 묻혔던 것이다. 방이동 고분인들은 석촌동 적석총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후에도 대대손손 백제 · 신라의 통치를 받으면서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문물도 그 때그 때 수용해가며 살았다. 그런 장기간의 세월 가운데 4∼5세기에 축조된 것이 5호분이고 그 이후 4호, 6호 등이 만들어졌으며 6호분은 6세기말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2017.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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