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두륜산 대흥사 천불전
가허루 안으로 들어서면 남원의 중심 전각인 천불전이다. 대흥사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건물의 짜임새가 매우 우아하고 화려하여 조선중기 이후에 성행한 다포계의 전형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에 따르면 천불전은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며,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형식으로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직경 70cm 가량의 거대한 괴목(槐木)으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단 정면에는 "施主 / 申鐘虛 / 郭玩月 / 庚申七月 日" 이라 씌어진 명문이 있다.
기둥머리는 창방(昌枋)으로 이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화려한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았다. 공포는 전면 어간에는 2구, 양 협간에는 1구씩의 공간포를 배치한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집을 이룬다. 외부로 뻗은 살미첨차는 간결하면서 강직하게 구부러져 끝에서 예리하게 솟아올랐다. 내부는 격자천장을 하였다. 특히 장주(長柱)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이한데 이는 아마도 천불을 봉안하기 위하여 공간을 충분히 사용하기 위한 배려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단 중앙으로는 7단의 계단을 짜 올려 전각에 오르게 하였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 하였고, 창호는 꽃살창으로 중앙칸에 3짝의 소슬꽃창문을, 좌우협칸은 2짝의 빗꽃살창을 달았다. 특히 국화무늬, 연꽃무늬, 무궁화무늬 등을 누각한 문짝들은 정교함이 드러나 있으며 창호의 상단에는 교창을 두지 않았다. 건물 정면 어간기둥의 상부에는 용두가 달려있는데 할아버지용을 보는 듯 무척이나 인자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천불전의 현판은 東國眞體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가 썼다. 겉 벽면에는 3면에 걸쳐 尋牛圖와 大行普賢菩薩 등 15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는 신중탱화와 사천왕탱화 등 불화가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탱화들은 초의(草衣)선사가 증사(證師)로 되어 있어 조선후기 불화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천불전에 안치된 천불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52)은 옥으로 만들어져 신비함을 더한다. 천불에는 그 조성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완호(玩虎) 대사는 초의선사의 스승이었는데, 1813년(순조13)에 천불전을 중건한 뒤 쌍봉사의 풍계(楓溪)대사에게 의뢰하여 경주의 불석산(不石山) 옥석(玉石)으로 천불을 조각하게 했다. 열 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천불을 완성하자, 순조 17년(1817) 경주 장진포(長津浦)에서 모두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흥사를 향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불중 768좌를 실은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장기현(長岐縣)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까지 밀려가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그 속에서 300여 개의 옥불(玉佛)을 발견하고, 서둘러 이를 봉안할 절을 짓기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이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 고 현몽하자, 하는 수 없이 해남으로 돌려보내면서 불상의 어깨나 밑바닥에 모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순존 18년(1818) 8월 15일에야 천불을 천불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함을 보인 바 있다. 인근지역 신도들이 꿈속에 불상들이 나타나 “가사를 입혀 달라”는 현몽을 여럿이서 꾸게 되었는데, 그 뒤부터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 따라서 이때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속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경주에는 불석산이란 산이 없지만 기림사 뒤쪽의 함월산 일대로 알려져 있다. 불상을 제작한 곳은 기림사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출토되는 불석이라 불리는 광물(석회석 계통의 광물, 백토, 벤토나이트의 일종)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기림사 천불전의 불상도 기림사의 불석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 광물은 물속에 있을(물에 담갔을) 때는 자유롭게 조각이 될 수 있지만, 마르고 나면 돌 같이 딱딱해 진다고 한다. 한편 불상을 실은 배가 떠난 장진포는 지금도 '장진'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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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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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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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2016.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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