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이,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경주읍성(慶州邑城) 내에 있었다. 경주읍성은 1012년(고려 현종 3)에 축성되었으며, 1378년(고려 우왕 4)에 개축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임금과 세조 임금 때 다시 지었다. 지금의 경주읍성은 조선시대 전기에 다시 지은 것이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경주읍성은 1746년(영조 22)에 다시 개축되었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약 2,300미터였다. 읍성 내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집경전(集慶殿), 관아 등의 건물이 있었다. 동서남북에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징례문(남문), 공진문(북문)이 각각 있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자도 갖추고 있었다.
경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동부동에 동쪽 성벽 90미터 정도만이 남아 있다. 일부 남아 있던 동쪽 성곽이 풍파에 허물어져 2004년에 복원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읍성의 치(성곽방어를 위해 돌출시킨 부분) 보수를 위해 읍성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지반석을 비롯한 성곽 축조 당시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후 북쪽의 도로면 일부를 발굴할 때 치의 기초도 확인되었다. 경주읍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6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1.222㎞로,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경주가 신라 이래 지방통치의 중심지였으므로 읍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동경통지』에 ‘1378년(우왕 4)에 고쳐 쌓았는데 높이가 12척7촌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우왕 이전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문은 징례문(徵禮門)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32년(인조 10)에 경주부윤 김식(金湜)이 고쳐 수리하고 동문·서문·북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의 규모가 둘레 4,075척(약 1.222㎞), 높이 12척이며, 우물이 80여 곳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1746년(영조 22)에 확장되었는데, 당시 성곽의 둘레는 약 2.3㎞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에는 향일문(向日門), 서쪽에는 망미문(望美門), 남쪽에는 징례문, 북쪽에는 공진문(拱辰門)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현재 집경전(集慶殿) 뒤쪽에 있는 석축 구조물을 고려시대 북문터로 추정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가 약 3.6m 정도인데,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대부분 헐리고 황성공원으로 가는 큰 길 왼쪽의 민가 뒤에 동쪽 성벽 약 40∼50m 가량만 남아 있다. 성벽은 대체로 가로 40∼50㎝, 세로 20∼30㎝ 정도의 잘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은 편이다. 간혹 성벽에서 탑재(塔材)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벽을 고쳐 쌓을 때 주변의 절에서 옮겨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경주읍성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읍성 축조에 사용된 신라시대 석재
<2015.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