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석탑 -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석가모니는 쿠시나가라의 열반당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서쪽을 바라보면서 열반에 든다. 석가모니의 수행비서였던 아난다는 석가모니의 장례절차에 대하여 문의하였다. 석가모니는 "모든 장례절차는 재가신도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출가 수행승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 장법은 전륜성왕의 예대로 하라"는 말을 남겼다. 아난다는 또 물었다.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입니까?" 석가모니는 "수행승들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自燈明 法燈明)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였다. 즉 불상이나 탑을 만드는 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재가신도들이 수많은 꽃을 공양하였고 1주일 후에 천관사에서 다비하니 여덟 자루 또는 8만4천개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때 각 나라와 신도들 사이에 사리분쟁이 일어났다. 이대 도로나(徒盧那)라는 바라문의 중재에 따라 사리를 8분하여 각기 탑을 세웠다. 이를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며 이때 세워진 탑을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고 한다. 뒤늦게 도착한 부족들이 사리를 담은 병과 다비한 재를 모아서 병탑(甁塔)과 재탑을 쌓으니 근본십탑(根本十塔)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신 연도는 BC6세기, BC553, BC554년, BC900년대라는 등 여러가지 기록이 잇다. 그런데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기원전624~554'으로 공식 채택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입멸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불기의 시작 역시 기원전 544년으로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BC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은 통일전쟁에서 많은 인명을 살상한데 대한 참회를 하면서 석가모니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서 여행을 하고, 전법사(傳法師)를 파견하여 불교를 홍보하고 전파했으며 룸비니와 쿠시나가라 등지에 아쇼카 석주라는 기둥을 세우고 조세감면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 그러면서 아쇼카왕은 전국의 사리를 모아서 8만 4천개의 탑을 마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근본팔탑 가운데 7기의 탑을 헐었지만 나머지 1기는 '사리공양을 더 잘할 자신이 있으면 탑을 헐라'는 신도들에 의해서 거부되면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탑은 아쇼카왕 이후 2세기 쯤에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리를 공양하는 신앙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사리신앙이라고 한다. 초기의 탑은 사찰내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수행승들이 석가모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가신도들은 석가모니의 법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오직 탑에 공양하는 신앙행위만을 행할 수 밖에 없었고 사원에 올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수행등들 사이에서 탑이 사원 안으로 들어와야한다는 주장이 재기되었고 그런 연후에 사원에도 탑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많은 탑이 만들어지다 보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넣느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나중에는 불상, 경전, 불구 등 법신사리를 진신사리 대신 탑에 안치하게 되었다. 사실 석가모니 입명 후 천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신라 당에 진신사리가 일을 리 만무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정같이 영롱한 사리가 탑에서 출토되지만 인도에서 사리는 바로 뼈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인도에 남아있는 탑 가운데 시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초기의 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산치대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복발형 탑으로서 동서남북 네 방향에 출입문이 있다. 신도들은 이 탑의 동쪽 문으로 들어와서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며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을 표시한다고 한다. 이것을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만(卍)자 모양이 된다. 우요삼잡은 태양의 운행을 상징하고 사리가 태양계를 지배함을 건축적으로 이상화시킨 것이 바로 스투파, 즉 탑인 것이다. 즉 탑이 우주의 중심축이며 태양이 우주를 지배하듯이 부처님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요삼잡은 인도의 예법으로 발전하여 존경심의 표현방법으로 정착되었다.
나원리 절터는 일탑일금당이나 상탑일금당, 또는 일탑삼금당으로 불려지는 삼국시대의 어느 가람배체와도 다른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쪽에 금당터가 있고, 서쪽 언덕위에 탑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구황동의 황복사터나 덕동호에 수몰된 고선사터에서 볼 수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 등 이른바 신라석탑의 시원양식에서 탑의 모든 부재를 조립하여 만들던 것에서 조립이 아닌 통돌을 사용하는 기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나원리탑은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지붕돌은 몇장의 돌을조립하여 만들고, 2층몸돌과 3층이상에서는 통돌을 사용하여 구성하였다. 나원리탑 이후에 만들어진 황복사터 삼층석탑이나 천군동 삼층석탑, 불국사 석가탑 등은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는 모두 통돌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나원리탑은 700년을 전후한 시기의 탑으로 편년이 가능해진다.
1996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하였다. 3층에서 사리장치가 출토되었는데 시무외여원인의 금동불과 금동탑, 그리고 소형목탑도 나왔다. 특히 사리를 감싸고 있는 종이에서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의 일부로 밝혀진 글자가 부분적으로 판독되었다. 무구정광대다리나경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인 701~702년경에 번역되어 낙양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것인데, 필사본(寫經)으로 보이는 나원리탑의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은 703~704년경에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나원리탑에서 다라니경이 나옴으로서 목판본인 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우리나라에서 인쇄하였다는 학설의 입지를 더 강화시켜 주었다.
석가탑이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면 나원리탑은 귀공자 같으면서도 건장하고 중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답사객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아 둔다.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오층석탑
▲탑신부
▲탑신부
▲탑신부
▲기단부
▲기단부
▲기단부
▲기단부
<2015. 11. 1>
'◈한국문화순례◈ > 서라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집경전지 (0) | 2015.11.12 |
---|---|
경주 집경전구기비 (0) | 2015.11.11 |
경주의 석탑 - 경주 분황사 석탑 (0) | 2015.11.09 |
경주의 석탑 - 경주 천군동 삼층석탑 (0) | 2015.10.23 |
경주 명활성 (0) | 201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