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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석탑 - 경주 천군동 삼층석탑

蔥叟 2015. 10. 23. 07:27

경주의 석탑 - 경주 천군동 삼층석탑

 

이곳 천군동(千軍洞)이나 보문호 서북쪽의 북군동(北軍洞) 등은 모두 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따라서 이곳이 서라벌의 동쪽을 지키는 명활산성과 뭔가 관련이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현재까지는 없는 실정이다. 이 절의 이름은 현재 알 수가 없어 단지 천군동 절터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절의 내력 또한 전혀 알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요네다 미요지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절터의 규모와 가람배치상태를 확인하였는데 가람배치는 감은사와 동일한 쌍탑일금당 형식의 가람이었다. 그러나 다만 익랑(翼廊中廊)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도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금당의 좌우 쪽의 회랑에 의 주간이 다른 회랑의 그것보다 좀 넓기 때문에 이곳이 바로 익랑이 있었던 곳으로 파악된다. 이 절은 탑의 양식으로 볼 때 감은사와 불국사를 이어주는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가람배치는 모두 익랑이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 절터에도 익랑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금당터의 동서 양쪽 주간이 다른 부분에 비하여 더 넓은 것으로 밝혀져 이를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절터를 발굴했을 때 다양한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사자, 새 등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와는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구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나 현재 이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신라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월성, 안압지, 첨성대 등을 통한 왕경을 이해해야 하고, 둘째로 남산을 중심으로 한 불상의 이해, 셋째 신라의 석탑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고분과 왕릉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바로 기와의 문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절의 성격은 진평왕 때에 동해안에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왕경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감은사와 기림사 등과 함께 교통로의 길목에 세워진 절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큰절은 모두 교통의 요지에 절이 세워졌다. 산골짜기에 절이 세워지는 것은 9세기 이후 신라 하대에 와서 성행하였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으로 이중 기낭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두 탑의 양식이나 모양이 똑 같다. 서탑은 상륜부의 일부가 남아있지만 동탑의 것은 없어졌다. 하층기단의 지대석 밑에 다시 한 장의 지반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8석으로 짜였고 그 위에 역시 8석으로 된 중석과 갑석을 얹었다. 중석은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졌으며 갑석 위에는 상층기단을 받치는 각형과 호형의 2단 받침을 마련하였다. 상층기단의 중석은 4장의 판석으로 짜고 우주와 탱주를 각각 2개씩 새졌다. 갑석은 역시 4매로 구성되었고 하부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2단으로 된 각형의 고임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몸돌 층마다 우주가 새겨졌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각층 5단이다. 추녀 밑은 직선이며 전각의 반전은 완만하다. 이 쌍탑은 황복사터 삼층석탑보다는 조금 더 늦게 석가탑보다는 조금 앞선 시기에 세워진 탑으로 석가탑보다는 덜 세련되고 덜 날씬한 모습이다. 층급받침이 5개이며 상하층 기단의 탱주가 모두 2개인 점으로 보아 거의 석가탑과 동시대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더 장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군동 동서삼층석탑

 

▲천군동 동서삼층석탑

 

▲천군동 동삼층석탑

 

▲천군동 동삼층석탑

 

▲동탑 탑신부

 

▲동탑 탑신부

 

▲동탑 기단부

 

▲천군동 서삼층석탑

 

▲서탑 탑신부

 

▲서탑 탑신부

 

▲서탑 기단부

 

▲서탑 상륜부

 

▲천군동 절터 금당터

 

▲천군동 절터 금당터

 

 

 

<2015.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