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경주분지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명활산(明活山)은 해발 245m의 낮은 산이나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부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활산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이며 배씨(裵氏)의 시조인 지타공(祗陀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五曰, 金山加*<里,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岐部, 又作韓*<岐,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 乃兒等東村屬焉.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조>
신라는 서라벌을 도성으로 정한 뒤 주변지역에 산성을 쌓아 왕궁을 방어했다. 특히 초기 신라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왜구의 주요 침입 길목인 동남쪽에 남선성과 명활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였다. 명활산은 신라시대 이래로 한 번도 산의 이름이 바뀐 적이 없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수도 경주의 동쪽 최전방 방어선이었다. 동해안에서 형산강을 거슬러 천북면을 거쳐 보문으로 가로질러 넘어오는 길과 양북 쪽으로 토함산을 넘어오는 적을 격퇴하는 길목이었다. 사실상 도성 방어의 가장 중요한 위치였던 것이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18대 실성왕 때 명활성(明活城)에서 왜(倭)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년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실성왕조>
왜구들은 평균 18년마다 한 번씩 신라 땅에 출몰하는데 그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경주, 울산, 언양, 부산 등지였다. 그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것은 서기 400년 신라 땅에 침입한 왜가 경주를 함락시켰을 때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기병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해 주었던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來 安羅人戍兵 △△△△△其△△△△△△△△
(영락) 10(40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있었는데 관군이 곧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다. △△△△△△△△ 뒤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쳐 빼앗아 탈환하였다. 안라인(신라인) 수병(戍兵)이 신라성과 △성에서 왜국를 궤멸시켰다. ....
<광개토태왕비>
왜구들은 본거지는 대마도였는데 대마도는 어업과 임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곳으로 농토가 좁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따라서 왜구들은 식량 확보가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왜구들이 신라의 해안지방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은 식량을 탈취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며 다음으로는 포로를 납치하여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던 것이다. 대마도에서 부산까지는 오늘날 약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왜구들은 거리가 먼 본토보다는 한반도에서 약탈행위를 저질렀다고 보인다. 주로 동해안의 울산이나 부산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때로는 왜구들이 신라의 수도 왕경까지 쳐들어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한 번도 신라를 정복하려는 야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이 국가의 존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신라는 처음에는 소극적인 방어전을 벌였지만 장기전에 돌입하면 멀리까지 추격하기도 했다. 왜구들은 동해안의 장기나 양포, 대왕암 쪽에서 쳐들어와서 영일만을 거쳐서 달아나곤 했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명활성까지는 이들을 막을 성이 전혀 없었다. 때로는 1,000여명의 포로가 잡혀간 기록도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서기 500년 이후에는 왜군이 경주에 더 이상 침범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26대 진평왕 5년(583)에 현재의 감포로 추정되는 동해안에 오늘날의 해군사령부격인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였고 이에 동해안은 더 이상 왜구가 침범하기 어려운 안전지대가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왜구의 출몰로 인한 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없어졌으며 전투기록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五年, 春正月, 始置船府署, 大監․弟監各一員.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 각 한 명씩을 두었다.
<삼국사기 진평왕조>
그 대신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왜구는 침입방향을 바꿔 울산방향으로 침입을 시도하게 되고 전투는 모화, 입실지역에서 벌어진다. 따라서 신라조정에서는 모화에 관문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명활성에서 특이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월성에 있었던 신라왕궁이 서기475년에서 488년까지 14년 동안 명활산성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이다.
○十八年, 春正月, 王移居<明活城>.
18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자비마립간조>
○十年, 春正月, 王移居<月城>
10년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삼국사기 소지마립간조>
그리고 진흥왕 때에 성을 다시 쌓았고 진평왕 때에는 성을 확장하였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삼국사기 진흥왕조>
○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개축하였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삼국사기 진평왕조>
이곳은 산성으로서 평지의 월성에 비하여 왕궁으로서는 매우 불편한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을 이곳으로 옮긴 이유를 지금까지는 고구려 장수왕의 북수남진정책(北守南進政策)의 위협 때문에 왕궁을 산성으로 옮겨 전투를 장기화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소지왕이 488년에 왕궁을 다시 월성으로 환궁한 이후에 고구려의 공격이 더 빈번하고 치열했기 때문에 명활성으로 왕궁을 옮겼던 이유가 고구려의 공격과 무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활성으로의 왕궁 이전은 기존 왕궁의 보수 등과 관련된 도시계획상의 문제 또는 행정체제 정비와 관련하여 왕궁을 옮겼다가 다시 월성으로 환궁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명활성과 관련하여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선덕여왕 16년에 일어났던 비담(비담)과 염종(염종)의 반란이었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선덕여왕조>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衄}?之兆也.” 士卒呼吼聲振(+天)?地.
16년 정미는 선덕왕 말년이며, 진덕왕 원년이었다.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하여 폐위시키려 하였다. 왕은 궁 안에서 이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抱大{火}?, 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呪}?曰: “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果{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 <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 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連坐者三十人}?.
대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 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 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 돌격하였다. 비담 등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비담은 진평왕이 죽은 후에 선덕여왕이 즉위하지 않았더라면 왕위계승의 1순위의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이 즉위함으로서 자신은 왕위에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세력의 확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여왕에 대한 반대를 표면적 이유로 내걸고 명활성을 본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의 반란군과 김유신의 토벌군 사이에 10여 일간의 대치는 승부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군의 본거지인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점성술로 길흉을 점쳤는데 정부군의 본영에 별이 떨어졌다는 것은 반란군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지략에 능했던 김유신은 지금이 경주시 율동 뒷산에서 연에다 불을 매달아 하늘로 날려 올림으로서 월성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떠오른 것처럼 선전하여 정부군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게 되고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마침내 정부군이 승리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때 연을 날려 불덩이를 하늘로 떠올렸던 산이 성부산(星浮山․별이 떠오른 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반란 사건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라의 병권(兵權)을 장악하게 되었고 결국은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여동생인 승만공주(勝慢公主)가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바로 28대 진덕여왕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사인(死因)이 과연 무엇인지는 의문에 쌓인 채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후에 명활성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부서의 설치 이후에 명활성의 역할이 더 이상 없어졌으며 반란의 본거지를 없애버렸던 고대의 관습에 의해 명활성을 폐쇄하였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는 역적사건이 나면 역적이 살던 집을 땅속에 묻고 못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동학의 교주였던 최재우가 참형을 당하자 용담정 일대의 마을 전체가 황폐화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런데 1989년, 이곳에서 명활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진흥왕 때 성을 쌓았다는 것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실성왕 때 쌓은 토성(土城)을 진흥왕 때에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1975년부터 80년까지 안압지를 준설하던 중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안압지의 물을 빼내고 3개의 섬에 둘렀던 호안석축 주위에 기대어 놓았던 자연석이 있던 곳에서 비석이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남산신성비로 추정했으나 경북대학교의 주보돈 교수는 이것을 명활성작성비로 추정하고, 명활성에서 또 다른 명활성작성비가 발견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주보돈의 예견대로 약 10년후 1989년에 명활성적성비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안압지는 67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679년에 완공되었는데 이곳에서 명활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전에 명활성은 용도 폐기된 상태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명활성작성비
辛未年土 月中作城也上人邏頭本彼部 / 伊皮尒利吉之郡中上人烏大谷鳩智支下干支 / 匠人比智休피日幷工人抽兮下干支徒作受長四步 / 五尺一村 文叱兮一伐徒作受長四步五尺一村□□ / 利파日徒受長四步五尺一村 合高十步長十 / 四步三尺三村 此記者古他門中西南回 / 行其作石立記 衆人至十一月十五日 / 作始十二月艹日了 積川五日 也 / 書寫人 源欣里阿尺
신미년 11월에 성을 만들었다.
상인나두는 본피부의 이피이리 길지이고, 군중 상인은 오대곡의 구지지 하간지이다.
장인인 비휴지 파일과 □인 추해 하간지가 거느린 무리는 길이 4보 5척 1촌, 문질혜 일벌이 거느린 무리는 길이 4보5척1촌, □□리 파일이 거느린 무리는 길이 4보5척1촌을 할당받았다. 합하면 높이는 □보이고 길이는 14보3촌이다.
이 기록은 고타문에서 서남쪽으로 돌아가서 돌로 만들어 세워 적었다.
많은 사람이 와서 11월15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12월 20일에 끝마치니 합하여 35일이 된다.
글을 쓰고 베낀 사람은 원흔리 아척이다.
▲명활성
▲명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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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성
▲명활성
▲명활성
▲명활성
▲명활성
▲명활성에서의 조망
▲명활성에서 본 북군동
▲명활성에서 본 보문호
▲명활성에서 본 보문호
▲명활성에서 본 보문호
▲명활성에서 본 보문호
<201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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