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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마라해를 바라보며 - 테키르닥 아타튀르크(Atatürk) 초상

蔥叟 2015. 1. 10. 09:59

마르마라해를 바라보며 - 테키르닥 아타튀르크(Atatürk) 초상

 

테키르닥이라는 도시에서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 한편에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보였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국부(國父)로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다른 위인들과의 비교 자체가 거부되는 인물이며, 터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만약 그를 모독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형법상의 처벌을 받는다. 이런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터키 국민들은 진심으로 그를 숭앙하고 사랑한다. 아타튀르크는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성(姓)인데 국부라는 뜻을 갖고 있다.(‘아타’는 아버지 라는 뜻) 1934년 터키가 새로이 성씨제도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였을 때, 터키 국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국부라는 뜻의 성을 부여한 것이다.

 

터키에서는 지폐와 동전할 것 없이 모든 액면의 화폐에 오로지 아타튀르크의 얼굴만 그려져 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그의 이름을 케말 파샤로 배웠는데 파샤는 '장군' 이란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인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에 있는 모든 시계는 1938년 11월 29일의 서거 시각을 기려 모든 시계가 09:05 에 정지되어 있다. 터키의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있으며 아타튀르크라는 명칭의 도로가 존재한다. 공공기관, 학교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기업체들까지 그의 초상을 사무실에 내걸고 있으며, 큰 도로에 접한 벽에는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활동상을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 중에도 지갑에 아타튀르크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는 1881년 살로니카(Salonica)라는 도시(현재의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서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93년 군사고등학교에 들어갔으며 1905년에는 이스탄불의 전쟁사관학교(War Academy)를 졸업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5년 다다넬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이듬해 35세의 나이로 장군이 된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무용담은 끝이 없을 정도이며 1차 세계대전과 독립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과 지략은 오늘에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패전 후 열강의 분할 점령에 맞서 터키독립전쟁을 벌였으며, 1923년에는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1938년 사망 까지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된다. 그는 유럽의 병자였던 터키를 단기간에 광범위한 개혁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게 된다. 그는 술탄제와 칼리프제도를 폐지하고 종교의 정치간섭을 불허하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게 되며 이러한 원칙은 오늘까지 터키공화국 국체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는 1부다처제를 폐지하는 등 남녀 평등을 실현시켰고, 라틴식 알파벳을 터키의 문자로 채택하였으며, 서양식 역법을 시행하는 등 정치, 군사, 법률, 사회, 문화, 경제 각 분야에서 폭넓은 개혁정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오늘날 터키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모자이크 초상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2014.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