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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문인석

蔥叟 2014. 6. 10. 07:34

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문인석

 

   무인석의 안쪽에는 문인석이 서 있는데 앞에는 평복을 입고 뒤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 이는 성덕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동시에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서역인 석상'과 마주 배치된 '카이저 수염'의 돌로 만든 문인상(文人像)은 문인이 아닌 무인(武人)이며, 그가 쓴 관(冠) 전면 중앙에 장식된 곤충도 매미가 아니라 벌(蜂)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신라고분 기초학술조사연구'를 통해 3D 스캔 결과를 토대로 밝혀졌다. 괘릉 '문인상'은 뚜렷한 근거 없이 문인으로 통용되다가 1996년 미술사학자인 이재중 씨가 '석오 윤용진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총'에 투고한 논문 '통일신라시대 왕릉 앞 석인(石人) 연구'를 통해 무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처음 제기했다. 이씨는 또 석인상이 쓴 관 중앙을 장식한 곤충이 매미(蟬)로 이 관이 중국에서 말하는 통천관(通天冠), 혹은 초선관(貂蟬冠)일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육안 관찰만으로 분명치 않은 이 석인상을 3D 스캔한 결과 무인이 착용하는 대수장포(大袖長袍)라는 큰 소매를 간춘 긴 도포 차림을 한 데다, 갑옷을 걸쳤으며, 더구나 문인들이 휴대하는 홀(笏) 대신 무인들이 드는 장검(長劍)을 잡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이것이 무인상임을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또한 석인상의 관을 장식한 곤충은 육안으로는 윤곽조차 알기 힘들지만 3D 스캔 결과 매미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반면, 벌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한 흔적을 드러냈다. 당시 중국의 황제릉 석인상에 매미가 보이고, 나아가 매미를 도안한 관을 중국에서 많이 썼다 해서 그에 이끌려 괘릉 '무인상'의 곤충 또한 매미로 간주했으나, 여러 모로 보아 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시 신라인들의 사상 체계에서 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또 이런 도안이 통일신라 고유의 독창적인 문양이었을까? 신라에서 괘릉이 축조되던 그 무렵 중국 당나라 사회에서 이미 벌을 도안한 관이 사용되었으며, 더구나 이런 관은 무인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예컨대 1995-96년 중국 샨시성고고연구소(陝西省考古硏究所)가 발굴한 당 예종(睿宗)의 아들 장혜태자(惠莊太子) 묘에 그려진 벽화에서는 벌을 장식한 관을 쓴 사람의 그림이 발견됐다. 나아가 7세기 초반 당나라에서 구양순(歐陽詢) 등이 편찬한 유서(類書. 분류식 백과사전)의 일종인 예문유취(藝文類聚)가 인용한 춘추담잠파(春秋潭潛巴)라는 문헌에 의하면 "조정에 대봉무사(大蜂武士)와 중봉적강(中蜂赤强), 흑불량(黑不梁)이 있으며 벌에는 독침이 있는데 이것으로 위험을 막으니 이런 까닭에 (벌이란 곤충은) 무사(武士)의 상징이라고 한다. 즉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벌은 무인의 상징물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벌이라는 명칭을 활용해 무사의 계급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唐)나라 예종(睿宗) 황제 아들인 혜장태자(惠庄太子)묘 벽화 인물도 중 벌(蜂)을 장식한 관을 쓴 무인상. 1995-1996년 발굴조사결과 드러났다.

 

▲문인석

 

▲문인석

 

▲문인석

 

▲문인석 상호

 

▲문인석 상호

 

 

 

<2014.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