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말방리 초월산 숭복사비
初月山崇福寺碑
숭복사비는 896년(진성여왕 10)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일찍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으며, 비석을 받쳤던 쌍귀부와 비편 몇 조각만이 전하고 있었다. 경주시는 2010년 부터 2013년까지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추어 최치원이 짓고 쓴 하동 쌍게사의 진감선사탑비의 글시를 이용, 비문을 집자하여 비신에 새겼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쌍귀부를 복제하고 없어진 이수를 고증하여 이 비석을 복원하였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 비신의 높이는 204cm, 두께 33cm, 폭 100cm이다.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후에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경주시 외동면(外東面) 말방리(末方里)의 현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개창하였다. 뒤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원성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해에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한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896년(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아마도 비는 대략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숭복사비
▲비신
▲이수
▲비문
▲비문
▲비문
<2014. 6. 6>
崇福寺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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