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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蔥叟 2014. 6. 9. 07:26

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이곳은 원래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가 있었던 절터였다.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시대 500년간 이곳은 잊혀진 곳이었다. 고려시대 경주지역의 사정은 현재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단지 고려사 열전 이의민조에 의하면 경주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던 곳, 아름답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난 곳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유적, 특히 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경주의 사정은 간접 자료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사찰을 비롯한 유적지들도 재정적(財政的)으로 운영이 불가능하여 폐사된 곳도 많았던 것 같다. 조선 초기의 경주지역 자료인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 등에도 신라시대의 절 이름이 모두 사라졌으며 왕릉 또한 30∼40기가 되지만 10기만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원성왕릉

 

▲원성왕릉

 

▲원성왕릉

 

괘릉은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완비된 능묘제도를 간직한 왕릉이다. 하지만 이 왕릉에 대한 기록 마저 사라지고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의 경주에서 울산을 잇는 교통로는 토함산의 서쪽 기슭을 끼면서 발달되었고 유적지도 교통로에 인접하였다.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하륜(河崙)이 경주 부윤(府尹)으로 있을 당시에는 이곳의 교통로가 거의 파괴되어 있어 하륜이 울산으로 가는 길에 민가도 없어 숲속에서 짐승을 피했다고 한다. 이때 사천왕사의 연상스님은 경주-울산 사이에 원(院)을 세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후 원이 완공되었을 때에 하륜이 다시 경주에 와서 연상스님과 사천왕사에서 만나 원의 이름을 지었는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물건에게 이로움을 준다는 의미의 혜리원(惠利院)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때 경주-울산간의 교통로는 토함산 서쪽 통로가 아니고 남산 동쪽 기슭을 타는 통로였다.

 

   그후 임진왜란 당시에 가등청정의 침입로가 바로 이 길이었는데 경주 읍성과 안강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에 처음으로 괘릉의 존재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때는 이미 주인을 잃은 왕릉이었다. 

 

   괘릉(掛陵)은 경주부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의 능이니 알지 못한다(不知何王陵). 전설에 의하면 수중에 장사하고 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여기에 흙을 쌓아 능을 만든 까닭에 괘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동경잡기>

 

▲원성왕릉

 

▲원성왕릉

 

▲원성왕릉

  

   앞서 언급한 경상도 지리지, 경상도 속찬 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 등의 서적들은 국가에서 펴낸 국가적인 사업이었는데 국가적인 사업에서 괘릉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경주 김씨들은 왕릉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1730년 왕릉을 세로 정하면서 『삼국사기』에 「원성왕은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의 「능은 토함산 서남쪽에 숭복사와 인접해 있고 최치원의 비가 남아있다」는 두 기록 가운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만 근거하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완전히 무시한 채, 왕릉이 매우 화려하여, 화장한 문무왕의 능이 물과 관련이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켜 이곳을 문무왕릉으로 정하고 비석까지 세웠다. 경주 김씨들은 이곳에서 문무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경주 김씨 이외에는 대왕암에서 제사를 지내는 촌극(寸劇)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폐불 정책에 따라 삼국유사의 기록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 있는 원성왕릉을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시대까지도 괘릉은 문무왕릉으로 전해져 오다가 1940년 경주박물관에서 조선금석총람에 의하여 숭복사비문이 확인됨으로서 원성왕릉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나 경주 김씨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텨오다가 1968년 5월 신라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해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밝혀졌고 이것이 한국일보에 대서특필됨으로서 경주 김씨들도 백기를 들고 괘릉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를 뽑아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왕릉이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성왕릉에는 능비가 없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능비가 있었더라면 쉽게 능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릉

 

▲원성왕릉

 

 

 

<2014.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