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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연천 신라 경순왕릉

蔥叟 2013. 2. 4. 09:34

신라왕릉 가는 길 - 연천 신라 경순왕릉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고랑포 나루터 뒤편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사적 제244호로 지정된 경순왕릉이 있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능이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제56대 왕(재위 927-935)으로 문성왕의 후손이며,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후백제, 고려로 분열되어 있었고,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자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지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도 불린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어려 자녀를 두었으며 978년 세상을 떠날 때 신라 유민들이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는 백리밖으로 나갈수 없다하여 이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 한다.

 

   경순왕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 영조때 후손들이 왕릉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능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의 강(岡)이 조성되고, 능상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과 장방형의 곡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2단의 계체적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위에는 능표와 상석이 있고, 중단에는 장명등과 좌우에 석양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문양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묘역에는 경순왕릉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재의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나 1748년 영조때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 면에서만 몇 개의 문자만 판독될 정도여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한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에는 또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의 재실이 있고, 봄과 가을 2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진다.

   능표의 전면에는 '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7자가 기록되어 있고 후변에는 다음과 같은 5행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宗三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

 

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 무자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년에 나라를고려에 넘겨주었다. 홍 태편흥국 무인년(978),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년(1747) 월 일에 다시 세우다.

 

▲경순왕릉

 

▲경순왕릉

 

▲경순왕릉

 

▲사초지

 

▲곡장

 

▲능상

 

▲능상

 

▲능상

 

▲능표

 

▲능표 전면

 

▲능표 후면

 

▲장명등

 

▲석양

 

▲망주석

 

▲신도비

 

▲재실

 

 

 

<201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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