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삼릉 가는 길 - 경주 월정교

蔥叟 2013. 1. 23. 06:50

삼릉 가는 길 - 경주 월정교

 

   월정교가 복원되었다. 완전 복원이 아닌 부분 복원이지만 1300여년 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무척 반갑다. 2008년부터 5년간 경주역사도시조성 사업으로 월성 남쪽 신라궁성의 통로인 월정교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지난해 1차 준공을 하였다. 월정교는 1984년부터 86년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북측교대와 남측교대의 거리가 60.56m이며 그 사이에 4개의 교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교각간의 거리는 12.55m이며 남북교대와 교각간의 거리는 11.46m였다. 월정교는 다리의 전체 길이가 약 63m, 폭 11m정도의 큰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월정교

 

▲월정교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되어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에 중수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경잡기” 에는 현재는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고 하여 “동경잡기” 가 집필된 조선 현종 10년(1669)경에는 이미 교량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교량은 760년(경덕왕 19년)에 조영되어 1280년(고려 충렬왕 6년)까지 최소 520년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월정교

 

▲월정교

 

   월정교는 석재 교각위에 목조 누각이 얹힌 형태인 누교이며, 길이 66m, 폭 9m로 총사업비 332억원을 투입해 누교부분을 완공한 것이다. 월정교 향후 계획은 양쪽 교대 위의 문루건립 및 주변정비를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중에 있으며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처 2013년 문루건립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2014년 월정교 복원이 완료되면 경주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찬란했던 통일신라 문화의 우수성과 다양한 볼거리 제공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가진 천년고도 경주의 우월성을 과시함과 아울러 문화관광산업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월정교

 

▲월정교

 

   월정교(月精橋)는 월성에서 남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 위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이곳은 왕궁 바로 남쪽으로 오늘날로 치면 종로 1번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에는 궁궐인 월성의 서쪽문인 귀정문(歸正門)을 지나 오늘날 경주공고 옆의 서천에 놓여있던 송교(松橋) 또는 금교(金橋)를 통해서 중국으로 갔으며 지금의 터미널 남쪽지점에서 사신을 맞이하곤 했었다. 그러나 통일 후 월정교가 가설되면서부터는 주로 월정교를 이용하였다. 월정교는 750년 전후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다리로써 동쪽의 일정교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크고 튼튼한 다리였었다. 신라 992년의 역사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월정교

 

▲월정교

 

   이 다리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월정교를 주제로 한 시의 내용 중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이라는 구절에서 알아볼 수 있다. 즉 '무지개 다리'(虹橋)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구름다리를 이르는 것이다. 이 시가 동국여지승람 경주고적조에 전하고 있어 월정교는 남천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다리로 고려시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은 다리는 무너졌지만 그 교각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80년대에 복원계획을 세우고 발굴한 결과 교각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복원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버리고 교각지만이 옛 모습을 지닌 채 물소리만이 잔잔히 들리고 있다. 또한 1280년 일연 스님이 입적하기 9년 전에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월정교

 

▲월정교

 

   기록에 의하면 원효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어려있는 유교(楡橋)가 있었는데 느릎나무가 아닌 잣나무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후대에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월정교 서쪽 약 19m 아래 지점에서는 목교(木橋)의 교각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나무의 종류는 잣나무였다고 한다. 개울 바닥 깊숙히 묻혀 있어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된 채로 발굴된 이 목교의 교각간의 간격은 4.9m로 8개가 확인됐다. 남천에는 이처럼 여러개의 다리가 놓여있어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이루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줬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단 하나의 다리도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북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것은 당시에 북천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명활산 쪽에서 흐르는 물은 경주분지를 가로질러 여러 개의 실개천 형태로 흘렀던 것이다.

 

▲월정교 처마

 

▲월정교 처마

 

▲월정교 상판

 

▲월정교 상판 

 

 

 

<2013.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