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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성 순례 - 경주 남산신성 장창터 중창

蔥叟 2013. 2. 13. 01:54

남산신성 순례 - 경주 남산신성 장창터 중창

 

   중창지는 동. 서창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창지에서 서쪽으로 약 100m 위치한 언덕 위에 있다. 3개의 창고 중 가장 결실이 심해 정확한 규모를 확인 할 수 없다. 방형초석 10여개만이 노출 되어 있으며, 초석크기는 70×72㎝이다. 또한 축대 석축 일부만 남아 있는데, 석축수법인 돌못이 축대 3단 부분에 사용 되었으며, 돌못 앞쪽 크기는 36×32㎝, 홈 턱은 11~12㎝ 뿌리길이는 160㎝이다.

 

   중창은 식량창고로서 길이가 99m로 거대한 건물이었음을 주춧돌과 와편으로 짐작케 한다. 중창지는 좌˙우창지의 중간에 위치하며, 서북편 기단 일부가 남북방향으로 14m정도 확인될 뿐, 결실이 심해 정확한 규모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방형초석 10여 점만이 제자리를 이탈한 채 노출되어 있다. 기단은 심석(心石)을 사용하여 견고히 축조하였다. 기 조사자료에 의하면, 건물의 좌우에 별도의 부속건물이 2동 있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쌀과 보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점으로 보아 곡식을 저장하였던 창고로 판단된다.

 

   축대 석축에는 석정을 사용하였는데 중창지의 서쪽 2단의 석축 사이사이에 아직도 남아있다. 석정간의 간격은 2.2m이며, 지반에서 약 45cm정도 띄어서 설치되어 있다. 못의 중심간 거리는 220cm이고 못 아랫단은 10cm정도 퇴물림되어 있다. 또한 방형초석은 가로 73cm, 세로 80cm, 높이 40cm이다.

 

三年 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3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장창을 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

 

○王初卽位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 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남산에 장창을 설치하였는데 길이가 50보였으며 넓이가 15보로서, 이 곳에다 미곡과 병기를 저장하였다. 이것이 우창이며, 또 천은사 서북쪽 산위에도 장창이 있으니, 이것은 좌창이라 한다.

 

<삼국유사 문호(무)왕 법민조>

 

   이 기록에서 미곡을 저장했하고 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탄화된 쌀과 보리 등 곡물이 확인 되고 있어 당시에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로 판단된다. 또한 이것이 우창이라고 하였다.

 

至二年丁未 ---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寶帛于王宮.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寶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2년 정미에 --- 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적도(賊盜)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와 5도주군의 96각 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 각간이 죽고 그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 등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므로 사량, 모량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삼국유사 혜공왕조>

 

○四年, 秋七月, 一吉湌<大恭>與弟阿湌<大廉>叛, 集衆, 圍王宮三十三日. 王軍討平之, 誅九族.   

4년 가을 7월,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반도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포위하였다. 왕의 군사가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4년조>


   혜공왕 때의 기록으로 미루어 76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장창이 불탈 때 곡식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는 것으로 보아 미곡을 저장했던 우창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장창이 불에 탄 것이 삼국유사는 혜공왕 정미(766)이라 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혜공왕 4년(768) 의 일이라고 하여 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창터

 

▲돌못

 

▲돌못

 

▲돌못

 

▲돌못

 

▲돌못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중창터

 

 

 

<2013.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