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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가는 길 - 경주 남천 춘양교터

蔥叟 2012. 11. 21. 05:05

삼릉 가는 길 - 경주 남천 춘양교터

 

   경덕왕 19년(760)에 완성된 일정교는 국립경주박물관 서쪽편에 위치하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남천(南川)의 바닥에 그 잔해만 남아있다. 다행히 돌다리(石橋)를 구성하였던 석재들은 장마철이면 범람하는 물결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일정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곳에 위치한 까닭에 점차 잊혀지고 있다.

 

   일정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9년 2월조에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일정교를 건립한 구체적인 이유는 명시하지 않고 있으나, 궁성내에 큰 연못을 파고 동시에 월정교와 춘양교 등을 축조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양교의 건립이 왕성인 신월성과 연계된 거대한 토목공사였음을 알게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주변을 발굴한 적이 없어 일정교와 신월성과의 관련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후일에 있을 일정교와 주변의 발굴은 월성과의 상관성 및 신라교량건축의 상당부분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998년 현재에는 국립경주박물관내 휴게소 자리의 발굴현장에서 일정교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시대 다리 이름은 일정교가 아닌 춘양교(春陽橋)였음을 알게 한다. 일정교가 처음 표기된 것은 조선시대 경주지역 사서인 동경잡기(1669)에서 일정교와 월정교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기록에 의하면 모두 무너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다리가 무너진 시기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리 이름 또한 어느 시기엔가 바뀌어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재로 보아 서편의 월정교보다 교량의 폭이 더 넓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일설에는 일정교를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 하고, 후에는 이를 칠성교(七星橋)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동경잡기의 기록에 효불효교는 교량조에 속해 잇으며 그 위치를 '경주부 동쪽 6리(府東六里)'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도 현존하는 것으로 되어 잇다. 또 한 그어머니가 사사로이 통하던 남자의 집의 물의 남쪽이라고 표현한 점은 효불효교가 남북으로 놓인 다리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일정교는 동서로 놓여있으며, 기록또한 고적조에 속해 있다. 위치는 문천상(蚊川上)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무너진 상태로 교량으 흔적만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다리는 서로 다른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조선시대는 남천과 북천의 위치에 대해 모두 '경주부 동쪽'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효불효교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춘양교터

 

▲춘양교터

 

▲춘양교터

 

▲춘양교터

  

 

 

<201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