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가는 길 - 경주 전인용사터
반월성 남쪽의 남천 너머에 남산을 사이에 두고 인용사터로 전해오는 절터가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에 의하면 인용사는 나당전쟁 중 당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김인문이 옥중에 갖히자 신라의 국민들이 김인문을 위하여 인용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가 신라로 돌아오는 해상에서 죽자 이를 미타도량으로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까지 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그가 옥중에 있을 때는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을 모시고 그의 무사함을 기원하였고 죽은 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여 그가 서방정토인 극락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는 미타도량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인용사터
○時唐之游兵, 諸將*<軍,兵>, 有留鎭而將謀襲我者, 王覺之, 發兵*<擊>之. 明年, 高宗使召仁問等, 讓之曰 “爾請我兵以滅麗, 害之何耶”, 乃下圓扉, 鍊兵五十萬, 以薛邦爲帥, 欲伐新羅. 時義相師西學入唐, 來見仁問, 仁問以事諭之,
이 때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를 치려고 했으므로 이를 알고 발병을 하여 쳤다. 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다가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유이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에 임명하여 신라를 경략케 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인다. - 이 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중략--
王聞文俊善奏, 帝有寬赦之意, 乃命强首先生, 作請放仁問表, 以舍人遠禹奏於唐, 帝見表流涕, 赦仁問慰送之, 仁問在獄時, 國人爲*<創,刱>寺, 名仁容寺, 開設觀音道場, 乃仁問來還, 死於海上, 改爲彌*<陀,陁>道場, 至今猶存.
왕은 문준이 당나라 황제에게 말을 잘하여 그 죄를 용서하여 줄 뜻이 있음을 알고 강수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표문을 짓게 하여 이것을 사인(舍人) 원우에게 주니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는데,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위로하고 죄를 사하여 놓아 보냈다. 인문이 옥에 있을 때에 신라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라고 하고 관음도량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으므로 미타도량이라 고쳤다. 그 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
▲인용사터
김인문은 무열왕의 줄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기도 하였다. 그는 66세에 죽었는데, 22년간을 당나라 서울에서 지냈다. 한때 경산에 있는 장산성을 축조하였으며, 고구려와의 정쟁 중에는 김유신과 함꼐 평양으로 구량수송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나당전쟁간에 있었던 그의 외교적 노력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죽어서는 중국에서 돌아와 무열왕릉과 같은 묘역에 묻혔다.
현재의 인용사터는 최근에 지정되었으나 명확한 증거나 관련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이 절터에는 두탑의 잔재가 남아있었으나 발굴조사후 임시로 옮겨놓았다. 동쪽탑은 1층 지붕돌과 2층 탑신이 없어졌고 서족탑은 탑 자리만 남아 있다. 두 탑재석은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을 5단으로 한 점, 옥개처마 밑선이 일직선으로 처리된 점, 네 모서리에 앙곡(仰曲)을 둔 점, 모서리 귀;밑부분 양쪽에 구멍을 뚫어 풍탁을 매달 수 있도록 한 점, 탑신석 및 노반석 받침이 2단인 점, 옥개석 밑부분 가장자리에서 3CM안쪽에 음각선의 물끊기홈을 둔 점 등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1층탑신 면석에는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남산 창림사터 삼층석탑 등에 보이는 것과 같이 문비를 표현하고 있다. 이 밖에 팔방 대좌의 지대석이 확인되고 있다.
▲인용사터
탑재를 조사한 문화재연구소는 이 절터에 대한 전승과정을 살피지 않고 인용사터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사찰이 창건되었을 675년경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절터를 인용사로 추정하는 것은 왕궁인 월성에 가까우므로 태종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을 위한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단서조차 없는 실정이다. 또한 삼층석탑재는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각기법과 다보탑 이후에나 등장하는 물끊기 홈의 존재로 미루어 김인문인 활약한 7세기 중엽보다는 대체로 1세기 정도 늦은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중간 보고서에 의하면 사찰관련 건물지의 조영상한을 금당지 적심하부를 비롯하여 각 건물지 내부에서 출토된 연화보상화문수막새와 지진구호 등을 볼 때 문헌상의 조영시기인 7세기 후반과는 차이가 있는 8세기 후반으로 보았다. 또 발굴조사에서 十자 모양 건물터와 가각 연못 유구가 확인되었고, 놋쇠로 만든 광명대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절터는 왕궁주변에 있었던 대규모 사찰로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음은 틀림없다. 지금 빈터에 잡초만 무성히 자란 이곳에 동서 두 탑을 복원해 놓으면 복원된 월정교와 함께 신라 당시의 서라벌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볼 거리가 되리라 본다.
▲인용사터
<201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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