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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조사당

蔥叟 2012. 6. 24. 05:47

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조사당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좁은 길이지만 자갈돌을 깔아서 포장하였다. 이 또한 무엇인가 중요한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암시였던 것이다. 자갈돌이 깔린 오솔길은 더없이 오롯하다. 좌우의 큰키나무들에 묻혀서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길. 이제 부석사를 찾은 순례자의 발걸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길이 끝나갈 즈음 다시 길은 두갈래로 나뉘어진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석사의 창건주를 모신 조사당이요, 왼쪽으로가면 자인당과 응진전이다. 
 

▲조사당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10여 채라고 한다. 그 가운데 4채가 경주의 양동마을에 있다고 한다. 대단한 마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물은 국내에 6채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2채가 부석사에 있다. 이 또한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1366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하면서 세운 건물이라는 것이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순례자는 이곳에서 조사당 건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곳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의상대사이다. 의상은 통일과 융합을 원리로 삼는 화엄사상을 신라에 전하여 삼국통일 직후 흐트러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낸 분이다. 뿐만 아니라 의상은 대단한 정치승려였다.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오지만 의상은 끝내 유학을 고집한 것이 첩보활동에 목적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사당 옆면

 

   귀국 후에도 정치 세력의 강력한 자문역할을 수행하였고, 왕명에 의하여 신라국경 지점의 낙산사와 옛 고구려와의 관문이었던 태백산 기슭에 부석사를 창건한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이 변방 오지에 이처럼 장대한 절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왕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승려라는 말이 오늘날의 어용승려라는 말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어용이란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조사당 건너편의 자인당과 응진전에는 3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들도 무척이나 조사당과 닮았음을 보면서 의상대사라는 큰 인물을 생각한다.

 

▲조사당 지붕

 

  

 

<201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