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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법흥동 임청각(臨淸閣)

蔥叟 2012. 6. 8. 00:08

안동 법흥동 임청각(臨淸閣)

 

   임청각(臨淸閣)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종택 건물과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중종 때 세운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이명의 17대 주손(冑孫)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된 몇 안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登東 而舒嘯 臨淸流而賦詩(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읍조린다)"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임청각

 

▲바깥행랑채

 

▲바깥행랑채

 

  지금은 철도개설로 낙동강과 단절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대문이 낙동강과 붙어있었다고 하니 임청각이라는 이름이 결코 집분위기와 동떨어진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임청각은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임청각은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어 고가도로나 도심의 건물로 주변이 산만하지만 예전에는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종택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집 대문을 누대樓臺 건축하였는데 바로 이 누대 앞에 낙동강이 흘러 2층 누대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집 앞 자연 풍광이 참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다. 
 

▲임청각

 

▲사랑채

 

▲안마당

 

   본채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잡았는데 총 50칸을 넘는다. 전면 아래서부터 동서 길이 12칸의 행랑채와 그 후면에 다시 같은 길이를 이룬 두채가 병행되는데 제일 뒤 건물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전면 좌우에는 앞뒤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어서 안마당은 세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서단은 다락방으로 남북을 연결하였으며 이들은 곳간으로 사용되고 부엌도 이쪽편에 위치하였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이고 맞배지붕들인데 대청은 소슬지붕이다.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집이나 안채와 대청은 굴도리집이다. 건축양식상으로는 대청의 가구재로서 포대공이 눈에 띤다. 대청의 규모는 3칸×4칸인데 전면에 퇴가 달렸다. 

  

▲안마당

 

▲우물

 

▲안체

 

   임청각은 규모뿐만 아니라 집 구조에서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임청각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횡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좌측에 몸채가 있고 우측으로 가면서 임청각의 별당인 군자정이 있고 맨 우측 언덕에 이 집의 사당이 배치되어있다. 언덕에 건물이 횡으로 배열되고 보니 지금은 철로 둑으로 막혀 제 위용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대가大家로서의 위세가 자못 당당하였을 것이다. 현재 집은 크게 보면 3열로 구성되어있다. 경사를 따라 맨 뒤에 있는 몸채가 일렬로 배치되었고, 가운데 안행랑채가 몸채와 같은 위치에 있고 한단 아래쪽에 바깥 행랑채가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을 수직방향으로 날개채로 연결하고 있다. 이런 폐쇄적인 구성은 그리 많지 않다. 위에 정침 부분은 月자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이런 구성은 화성에 있는 정용채 가옥과 같은 배치로서 매우 폐쇄적인 구조이다. 
 

▲안채

 

▲안채

 

▲안채

 

   이와 같은 독특한 임청각 구조 때문에 임청각 평면 형태를 문자형文字形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용用자 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日자와 月자를 합친 형태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임청각의 정형화된 형태 때문에 문자형으로 집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임청각은 특별한 형태 때문에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형 마당을 중심으로 각 실이 배치된다. 이런 중정형 집은 중정이 넓지 않을 경우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 데 임청각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앞쪽 안행랑채가 2층으로 지어져 답답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집은 매우 크고 당당하게 지어졌으나 안채에서 생활하는 안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감옥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폐쇄적인 구조이다. 
 

▲안채마루 판문 문설주

 

▲안채마루

 

▲안채마루 문설주

 

   임청각이 폐쇄적인 구조를 지녔지만 집은 매우 튼실하게 지어졌다. 부재도 넉넉히 사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안채를 보면 민도리집이기는 하지만 보를 받치는 동자주가 포형동자주로 되어있는데 아름답게 초각이 되어있고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도 매우 화려하게 초각이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매우 공력을 들여지는 집임에는 틀림없다. 이 집에서 주목을 받는 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쪽에 있는 방이다. 앞에는 우물이 있어 우물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임청각의 배치로 보아 사랑채로 쓰였다고 보이는데 종중 안내책자에는 산청(産廳)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정승 3명이 태어난다고 하는 곳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이상룡선생이 태어났고 외손(外孫)으로는 문헌공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쨌든 집 구조를 보면 작은 사랑채로 쓰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안행랑채

 

▲안행랑채

 

▲행랑중정

 

   지금 임청각은 1942년에 개통된 집 앞을 지나가는 철도 때문에 50채나 되는 행랑채를 잃어버렸지만 남은 규모만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반가다. 집의 구조도 독특해서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가구식 구조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경사지에 배치한 탓에 행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마당이 비좁고 폐쇄적이며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누정인 군자정이 횡으로 펼쳐져 그 웅장한 규모가 더 강조되어 보인다. 서까래도 위 서까래와 아래 서까래가 주먹장이음으로 결구(結構)되어, 엇갈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다. 전하는 얘기로는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문이 낙동강가에 닿아 있었고, 대문을 2층 누각으로 지어 거기서 낙동강에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집이었고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리던 가문임에 틀림없다.

 

▲안행랑채

 

▲안행랑채

 

▲안행랑채

 

   그러던 가문이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같이 기울기 시작했다. 가문의 모든 것을 팔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1896년 가야산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나라가 망하자 과감하게 사당에 모셔 놓았던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너희들은 이제 독립군이다”라고 선언하며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식솔을 이끌고 떠났다. 당대에 대한 책임을 가장 통렬히 인식하고 삼정승이 나온다는 길지를 풍찬노숙의 가시밭길로 만든 사람,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이 임청각이다.

 

▲사잇문

 

▲사당

 

▲사당

 

   임청각의 주인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에 힘썼던 사람들이다. 벼슬한 이는 500년 동안 한 사람뿐이지만 이들은 대대로 영남 유림의 학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때문에 안동에서 임청각은 학문하는 집안의 집으로 명성이 높았다.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유향좌수와 도산서원의 원장 격인 도산서원 전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이 바로 임청각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

 

 

 

<2012.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