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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삼랑사터 당간지주

蔥叟 2011. 11. 7. 03:38

경주 삼랑사터 당간지주

 

   삼랑사는 서천변에 있었는데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절터에 당간지주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높이 3.66m로 보물 제 127호이다. 삼랑(三郞)은 세 명의 화랑을 가리키는 말로 짐작된다. 헌강왕은 883년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동경잡기』에는 삼랑사에 박물이 찬하고,요극일이 쓴 사적비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삼랑사비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삼랑사터라고 추정하는 것은 대정 7년(1918)에 일본인 오전제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를 다수 발견한데서 유래되었다.
  

▲삼랑사터 당간지주

 

▲당간지주

 

▲당간지주

 

   신문왕 시대에 중 경흥(憬興)의 성은 수씨(水氏)요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 살에 중이 되어 일체 불경(三藏) 에 능통하니 명망이 당대에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681)에 문무왕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신문왕에게 유촉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나의 부탁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매 특히 국로(國老)로 삼아 삼랑사(三郞寺)에 있게 하였더니 갑자기 병이 들었다. 달포가 되자 웬 여승이 와서 찾아보고 「화엄경」중에 있는 '착한 벗이 병을 낫게 한다(善友原病)'는 말로써 이르기를, "지금 스님의 병은 걱정으로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이외다"라고 하고 곧 열한 가지 모양의 탈을 만들어 각각 우스꽝스런 춤을 추었다.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모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가 입을 가누지 못할 만큼 우스웠던지라 국사의 병이 감쪽같이 씻은 듯 나았다. 여승은 대문을 나서서 바로 남항사(南巷寺)에 들어가 사라졌는데 그가 가졌던 지팡이만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을 그린 화폭 앞에 놓여 있었다.

 

▲당간지주

 

▲당간지주

 

▲당간지주

 

   하루는 경흥이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매 수종하는 자가 먼저 동쪽 대문 밖에서  준비를 하는데, 말이며 안장이 매우 훌륭하고 신발이며 갓이며 차림차림이 버젓하게 늘어서니 사람들이 모두 길을 피하는데, 웬 거사가 볼품없는 모양으로 손에는 지팡이,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 쉬고 있었다. 광주리 속을 보니 마른 고기가 있었다. 따르는 자가 꾸짖어 "네가 중의 복색을 하고 어째서 더러운 물건을 졌느냐" 라고 하니 중이 말하기를, "두 다리 사이에 생고기를 끼울 바에는 등에다가 시장의 마른 고기를 지는 것이 무슨 흉이 되랴?" 하고 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이 막 대문을 나서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쫓으니 남산 문수사(文殊寺) 대문 밖에 와서 광주리를 던져버리고 사라졌는데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있고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심부름한 사람이 와서 고하니 경흥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 오셔서 내가 짐승 타는 것을 경계하심이다" 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의 아름다운 덕행과 남긴 사적은 중 현본(玄本)이 지은 삼랑사(三郞寺)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경흥우성(憬興遇聖)조>

 

▲당간지주

 

▲당간지주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삼랑사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세워져 있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만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주 보는 면의 바깥 면에 세로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꼭대기는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한 단의 굴곡을 이루어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앙부분만 파여져 전체적으로 가늘어져 있다. 지주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아래위 두 군데에 파놓았다. 각 변의 길이가 적당하고, 높이와도 잘 조화되어 통일신라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앙부분의 두께를 얇게 하는 등 장식에 신경을 쓰고 있다. 원래 두 지주는 5m의 거리를 두고 외면을 마주보고 서 있었던 것을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따라서 원 위치와 상대 간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삼랑사터 당간지주는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장식과 치석 수법에서 화려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조화와 비례도 잘 어울리고 있어 세련된 이미지를 풍긴다.

 

 

 

<201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