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오릉

蔥叟 2011. 11. 6. 04:51

경주 오릉

 

   오릉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제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 등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사적 제127호이며 원래의 이름은 사릉(蛇陵)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오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合葬)을 하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몸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

 

▲오릉

 

▲오릉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자면 사릉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두사람의 무덤으로 보아야 한다.  박혁거세는 서기 4년에 죽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는 경주 조양동 고분과 같은 토광목관묘 시대이다. 토광목관묘는 관 속에서 외래계통의 유물이 출토되곤 하는데 이들 유물로 신분을 과시할 뿐 봉분의 유무조차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릉과 같은 봉분이 큰 무덤을 만들던 시기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봉분은 후손들이 대형봉분을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숭덕전(崇德殿)은 담엄사가 있던 자리인데 세종 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숭덕전을 만들고 경주부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자 제사가 형식적으로 흐르게 되어 박씨 문중에서는 1700년대부터 제사에 관여했다. 이때부터 다섯 분, 즉 혁거세왕, 알영부인,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릉

 

▲오릉

 

   오릉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지정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무덤의 구조는 외형으로 볼 때 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봉분의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적석목곽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서기 550년 전후의 무덤으로 여겨지며 김씨와 박씨가 완전히 별족으로 나뉘어진 후 박씨의 시조 무덤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오릉 가운데에 표형분(瓢形墳)이 하나 있는데 이 또한 서기 350~550년 사이의 기간에만 축조되던 적석목곽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적석목곽분은 박혁거세 시대에는 축조되지 않던 무덤이므로 오릉이 박혁거세와 관계없는 무덤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추왕과 죽엽군 이야기의 끝부분에 나오는 오릉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는 신라인들이 오릉의 존재를 알고 혁거세의 무덤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릉

 

▲오릉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墓)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미추왕죽엽군조>

 

   즉, 본래는 오릉을 대묘라 불렀는데 김유신 이후 미추왕릉을 대묘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오릉

 

▲오릉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曇巖寺)北.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별세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21년, 가을 9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왕조>

  

三十四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4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조>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蛇陵園}>內.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조>

 

▲오릉

 

▲억새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신라본기는 오릉 또는 사릉의 주인공이 박혁거세 거서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비합리적인 설화에 근거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박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니사금, 파사 니사금 등이 사릉원내를 장지(葬地)로 선택한 것처럼 기록했다. 결국 경주박씨 문중에서는 설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보다는 보다 합리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따라서 시조비인 알영의 능을 추가하여 오릉으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릉은 8릉이 되어야 마땅해진다. 다섯 동강난 혁거세릉 5기에다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을 더하면 8기가 되는 것이다.

 

▲억새

 

▲억새

 

   발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으나 경주일대에서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이 아직은 확인된 것이 없으며 또한 그 위치와 봉분의 구조로 보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남쪽의 1기는 표형분(瓢形墳)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이 능역에는 실제로 6기의 왕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봉분의 규모도 혁거세 거서간의 능이라고 추정되는 고분만이 대형분이고 나머지는 소형의 고분들로서 왕릉으로 보기에도 의심이 간다. 즉, 중고기에 적석목곽분이 평지를 떠날 때 조영된 것으로 왕족묘 3기에 나머지는 배장된 무덤으로 보인다.  

 

▲갈대

 

▲들꽃

  

   신라인들이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것은 진흥왕이었다. 법흥왕이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모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이를 성모명진(姓某名眞)이라 생각하였다. 즉 성은 모씨이고 이름은 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진흥왕은 김진흥이라 했으며 그 뒤로 김진지, 김선덕, 김진덕, 김춘추 등으로 불렀다. 이것은 삼국시대에 아직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드디어 박씨가 기록에 등장하는데 의상대사의 경우 박씨와 동시에 김씨로도 나타나며, 성덕대왕신종에 '김박기'란 이름이 등장한 후 통일신라 금석문에 박씨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김씨에서 박씨와 석씨가 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신라시대의 성씨는 오늘날과 같은 혈족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본래 김행이었으나 왕건으로 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아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신라 충신으로 유명한 박제상도 삼국유사에 김제상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김해 김씨로서 처음으로 성씨를 쓴 사람은 김유신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서현'이나 할아버지 '무력' 등은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전 전후하여 김씨들이 박씨 성이 생기면서 거꾸로 혁거세릉으로 칭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11.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