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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蔥叟 2011. 7. 17. 06:06

평창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복원품>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탑을 향해서 궤좌한 석조보살좌상이 있었다.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는 복제품을 마들어 모셔놓았다. 〈월정사사적기〉에 의하면 탑 앞에는 손에 향로를 들고 꿇어앉아 공양하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 있었다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 불우(江陵 佛宇)조에는 자장의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어 탑 위로 1,000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고 하는 고려시대 정추(鄭樞)의 시가 전해지고 있어 이 보살상의 이름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약왕보살은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병고를 덜어주는 보살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의하면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채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명덕국(日月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장차 그가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그가 바로 약왕보살이다.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머리에는 길다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관 밑으로는 보발(寶髮)이 내려와 양 어깨 위를 덮고 있다. 얼굴은 길고 통통한 편으로 눈·코·입이 조그마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코와 인중이 짧게 처리되어 있어 이목구비가 얼굴 중심부에 몰려 있으며 턱 밑이 유난히 살쪄 보인다. 신체는 비교적 가늘고 밋밋하게 처리되었으며, 하체에 비해 상반부를 크게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다소 불안정한 비례감을 보여준다. 특히 둥근 연화대좌 위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듯한 공양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은 연산 개태사(開泰寺)에 있는 석조보살좌상(머리부분 파손)을 비롯하여 강릉의 신복사지3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 등 고려시대의 다른 공양보살상에서도 볼 수 있다.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

 

   빈약한 가슴 위로 걸친 번잡한 천의는 목걸이·팔찌와 함께 장식적인 효과를 주며, 옷주름선은 굵고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오른팔 밑에는 동자상이 놓여 있는데 뒤에 보수한 것으로 보이며 세부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이 보살상의 통통하고 부은 듯한 얼굴 표현, 높은 원통과 같은 보관, 굵직한 주름으로 나타난 옷 표현 등은 같은 지역인 강릉에서 출토된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이나 신복사지석조보살좌상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높은 관은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형태로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중국 요나라의 보살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보살상들은 대체로 강원도 명주지방을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던 조각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조보살좌상

 

석조보살좌상(진품)

 

 

 

<2011.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