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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나라 가는 길 - 경주 낭산 능지탑

蔥叟 2011. 6. 10. 05:16

부처님 나라 가는 길 - 경주 낭산 능지탑

 

   능지탑(陵只塔)은 외형이 구정동 방형분과 비슷하지만 봉분이 없고 2층탑형식으로 조영된 유구이다. 일제시대에는 무너진 채 흙무더기 상태였던 유적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1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까지 이곳에는 돌무더기만이 뒹굴고 있었다. 1969년 신라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를 하였다. 하지만 발굴조사한지 40년이 지나도록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출토된 유물은 일부가 경주박물관에 나머지가 용인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결과 소조불 4기가 동서남북 사방에 모셔져 있었으며 바닥이 검게 탄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강우방은 1994년 낭산 학술세미나에서 소조불의 도면과 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발굴조사를 하였던 황수영은 이를 근거로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능지탑

 

▲능지탑

 

   그러나 능지탑과 관련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문헌 기록에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문무왕 사후에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문이 괴비고, 천존고 등 창고의 문 바깥을 말하는 것일까? 경북대 황희주 교수에 의하면 고문이란  중국의 한화대전에 나오는 말로 황성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를 천자5문(天子五門)이라 하는데 바깥족에서부터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雉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 그것이다. 5문이라 하며 제후(신하)가 황제(왕)를 만나러 갈 때 통과하는 문을 말한다. 신하가 왕을 만나러 갈 때 5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신라시대 왕성이었던 월성바깥에는 성곽시설이 없었고 반월성의 문만 통과하면 바로 왕성으로 들어갈 수 잇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관념상의 5문을 설정하고 통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문(庫門) 양쪽에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다. 이때 황제를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이 자리한다. 또 신라의 왕궁인 월성은 왕경의 남쪽에서 북향하고 있다. 한편 월성 북쪽의 동부사적지 건물터의 초석 배치구조를 연구한 결과 중국의 종묘건물의 구조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첨성대 앞 도로의 유구를 발굴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이 신라의 종묘 건물터라면 사직건물터는 그 동편에 있을 것이고 종묘와 사직 사이에 고문이 있을 것이다. 고문(庫門)은 월성 북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능지탑

 

▲능지탑 십이지신상(토끼상)

 

   그래서 문무왕을 화장한 후에 재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고문이라는 증거도 없으며 십이지신상의 조각 수법도 7세기말보다 훨씬 뒤의 조각으로 보이기 때문에 뒷날에 문무왕을 기념할 만한 사건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다만 헌덕왕 때 이차돈의 비와 아도화상비를 세우는 등 현창 사업을 많이 했던 점으로 미루어 능지 또는 능시 마을의 기록에 적용시켜 능지탑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층의 각면은 한변 약 23.3m, 높이 약 1.9m로서 각면에 십이지신상을 3구씩 배치하였다. 하지만 동쪽의 호랑이상,  용상과 남쪽의 뱀상은 없어졌다. 남아있는 나머지 십이지신상 부조도 평복과 무복, 그리고 조각 기법 및 크기에서 차이를 보인다. 십이지신상 중에서 쥐상은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었다. 따라서 쥐상이 아니라 호랑이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다른 상들이 모두 무복을 입은데 비하여 평복을 입고 있다. 또 다른 상에 비해 가늘고 길어서 구황동 왕릉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상은 암릉 위에 서 있어 헌덕왕릉의 상과 시대적으로 상통한다. 또 돼지상과 개상은 서로 바뀌어 배치되어있다. 복원 후에 장마철에 유적이 무너지고 십이지신상이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도난 된 토끼상은 낭산주변에서 회수하기도 하였다.

 

▲능지탑 북편의 남은 석재들

 

 

 

<2011.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