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나라 가는 길 - 경주 낭산 사천왕사터
낭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사천왕사터는 수미산의 중턱 사왕천이다. 사천왕이 사는 곳이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중턱인 사왕천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그러므로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사는 수미산의 기슭이며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은 수미산인 것이다. 전불시대칠처가람 가운데 여섯 번째인 사천왕사(四川王寺)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불법(佛法)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창건된 절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노선을 걷는다. 그러나 당나라는 계속 신라를 속국화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서 나당 양국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급기야 673년 당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정복하려는 전면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당군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문호왕 법민조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사천왕사터 서귀부
당나라 유격병의 모든 장병들이 진에 머물면서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고 계획하는 것을 왕(문무왕)이 알아채고 군사를 동원하였더니 이듬해에 당고종이 인문(金仁문, 문무왕의 동생으로 당시 당나라에 있었다)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 군사를 해치려는 것은 어떤 까닭이냐?" 하고는 곧 옥(원)에 가두고 50만 군사를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대장으로 삼아 신라를 치려하였다. 이때에 의상법사(義相法師)가 불법 공부를 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있던 중 인문을 찾아와보니 인문이 이 일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의상이 곧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왕이 매우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말하기를, "요즘 명랑법사(明朗法師)라는 이가 있어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받아왔다고 하오니 한번 물어보소서" 하였다. 명랑이 왕에게 아뢰되,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바 그곳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道場)을 개설하면 될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급보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나라 지경까지 와서 바다 위에 순회하고 있사외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벌써 절박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명랑이 말하기를, "채색 비단으로써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됩니다"하여 왕이 채색 비단으로써 절집을 꾸리고 풀(草)로써 오방(五方·동,서,남,북,중앙)이 신상을 꾸려놓고 유가 명승(瑜伽明僧) 열두 명이 명랑법사를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文豆婁)의 비밀 술법을 썼다. 이때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아직 교전을 하지 않았는데 풍랑이 크게 일어나서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뒤에 절을 고쳐지어 사천왕사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불단의 법석이 계속되고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
결국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은 절이었다. 물론 서해에 당군이 수몰 당하였다는 것은 일부 당군이 죽은 것을 미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창건된 사천왕사는 이후에도 호국사찰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고려시대에도 왜구가 동해안으로 침입할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또 신라가 멸망할 때에도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제54대 경명왕 시대인 정명(貞明) 5년 무인(918)에 사천왕사 벽에 그린 개가 짖으므로 사흘 동안 불경을 설법하여 푸닥거리를 하였더니 반나절 만에 또 짖었다. 또 10월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에 그린 개가 뛰어나와 마당 복판으로 달리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어쨌든 사천왕사는 조선 초기까지는 절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그후 조선의 폐불정책(廢佛政策)에 따라 폐사된 것 같다.
▲사천왕사터 서귀부
▲사천왕사터 서귀부
사천왕사를 세우면서 신라에는 사천왕신앙이 들어왔으며 이후에 사천왕 조각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사천왕사에서 소조 사천왕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바로 양지(良志)라는 스님이었다. 양지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상반신이 깨어진 채로 남아있다. 이 소조 사천왕상은 삼국통일 후 사천왕사 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것인데 그 힘차고 정교한 솜씨는 통일신라가 힘찬 새 출발을 시작하면서 만든 회심의 명작이다. 양지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중 양지는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으나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그 행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지팡이 머리에 베 자루 한 개를 달아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간다. 지팡이가 흔들려 소리가 나면 그 집에서 이것을 알고 재 올릴 비용을 집어넣는다. 자루가 다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사는 절 이름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으니 그의 신통하고 이상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다.
그는 여러 가지 재주에 두루 능통하여 비할 바 없이 신묘하며 글씨도 잘 썼다. 영묘사(靈妙寺)의 장륙삼존, 천왕상 및 전각탑의 기와와 천왕사탑 아랫도리의 8부 신장, 법림사(法林寺)의 주존 삼불, 좌우의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 만든 것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이름 현판도 그가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한 개를 만들고 이와 함께 부처 3,000개를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가운데 두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빚어 만들 때에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가 잡념 없는 상태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중 남녀들이 다투어가면서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양지석장(良志錫杖)조>
그는 소조(塑彫)의 명수였다. 작은 금동제이지만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는 감은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외함의 사천왕상도 그가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천왕사, 영묘사, 안압지에서 나온 힘차고 화려한 기와(瓦塼)들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진흙의 요술쟁이였던 것이다. 강우방은 우리의 위대한 조각가 양지의 이름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개탄하고 있다.
「여러분은 작품도 거의 남이 있지 않은 김생(金生)이나 솔거(率居)는 알면서,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 위대한 예술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 천재가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사나이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없으니 여러분은 알 턱이 없지요. 아들이나 친구에게 물어도 귀에 설어 오히려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우리는 이제 위대한 양지라는 예술가를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이름처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 양지(良志)를 왜 모르십니까.」
<강우방 '미의순례'>
사천왕사에 살았던 또 한분의 스님은 월명(月明)스님이었다. 월명스님은 경덕왕의 명을 받들어 도솔가(도率歌)를 지었으며, 또한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제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광풍이 불어 종이돈이 날려 올라가 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 향가가 바로 제망매가(제망매가)이다.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에 살면서 젓대를 잘 불었다. 한번은 달밤에 젓대를 불면서 대문 앞 행길로 지나가니 달이 이 때문에 운행을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하였으며, 스님도 이 때문에 유명해졌다.
▲사천왕사터 서귀부
▲사천왕사터 서귀부
사천왕사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었다. 일명 회탑식(回塔式)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사찰의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3개의 금당이 탑을 둘러싸는 형식의 가람배치였다. 반면 백제는 사찰의 입구에 못을 두고 못을 건너면 탑이 나타나고 탑의 뒤에는 금당이 있고 금당의 뒤편에 강당이 모두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늘어선 이른바 일탑일금당 방식의 가람을 경영하였다.
이에 비하여 신라의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와 통일 후를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북방불교인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가 유행했다. 그러나 고구려와는 달리 회탑식 가람배치는 찾아볼 수 없고 분황사와 같은 품자형(品字形)의 가람배치를 하거나 황룡사와 같이 3개의 금당을 동서 일직선상에 병렬시키는 가람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백제의 가람배치 양식이 들어와 금당과 강당을 짓게 되는데 금당 뜰에 들어서는 탑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단탑에서 동서로 두 개의 탑을 세우는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인 이른바 쌍탑일금당의 형식이 등장한다. 쌍탑일금당 가람의 첫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며 제2호가 망덕사이며, 제3호는 감은사였다. 다만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목탑을 조영하였으나 감은사에서는 석탑이 등장하는 것이다. 감은사탑 이후에 신라에서는 주로 석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목탑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9세기의 절이었던 보문사에 목탑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삼국시대 이래로 건립되던 목탑 문화의 전통은 통일 후에도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사천왕사 금당터의 뒤편에는 종루터와 경루터로 알려져있는 건물터가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건물터에는 사방으로 놓여있는 초석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는데 구멍의 용도도 현재는 알 수가 없다. 사천왕사터의 남쪽에는 머리가 잘려진 2마리의 귀부가 힘찬 모습으로 서 있는데 부근에서 명문와편에 많이 발견되었지만 비편의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최근 사천왕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금당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1차, 2차 금당터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1차 가람은 원래 크기가 작아 비단으로 오방색으로 절집을 꾸민 임시가람이며 2차가람은 전쟁 후 건립한 정식 금당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동탑 기단부 발굴 결과 녹유신장상이 한면에 3구씩 조각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그동안 이 신장상이 사천왕상이냐 팔부신중상이냐의 논란에 또 다른 논쟁에 불을 집혔다. 사천왕상이면 4구씩 배치되어야 하고 팔부신중상이면 8구씩 이어야 하는데 12구씩 동서 양쪽에 모두 24구가 배치된 것이다. 또 7세기 중후반에는 아직 팔부중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사천왕상은 기단부에 조각된 예가 없고 활을 든 사천왕 도상의 예도 없다.
이 논쟁의 와중에 임영애는 신왕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사천왕사 창건시의 소의경전은 밀교의 관전경이며 따라서 수많은 신장 중에서 신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이 신장상은 탑을 보호하는 호법선신이라는 주장이다. 이번 발굴좌사에서 이 주장에 힘이 실렸다. 사천왕사 창건 관련 내용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적비(事蹟碑)의 조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 조각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神) 중 하나인 '신장'(神將)이라는 문구가 확인됨으로써 앞서 이 사찰의 목탑터에서 출토된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녹유전<綠釉塼>)의 정체를 둘러싼 한국미술사학계의 해묵은 논쟁이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사천왕사터 서귀부
가람 구조와 사역(寺域) 확인을 위한 최근 발굴조사 과정에서 절터 남쪽에 위치한 한 쌍의 귀부(龜趺. 거북 모양 비석받침) 중 동편 귀부 앞쪽 기단 석열(石列)에서 사천왕사 사적비(事蹟碑)의 일부로 추정되는 조각 1점과 이수(비석 윗부분의 용무늬 장식) 조각 1점을 각각 발견했다. 이 석비 조각은 화강암 재질로, 가로 55㎝, 세로 11㎝, 두께 14㎝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형 비편이지만 매끈하게 다듬은 비면에 3.5㎝가량 되는 간격으로 가로와 세로로 음각선을 넣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2~2.5㎝ 크기에 해서체로, 통일신라시대 석비에서 보이는 각자법(글자 새김법)을 보여준다. 이 비편은 가로로 길게 조각난 형태로 비문은 15행 정도 확인된다. 그러나 1행당 글자가 1~3자씩밖에 존재하지 않아 문자는 선명하지만 문맥이 거의 연결되지 않는 데다 내용 역시 알기는 어렵다. 비문 조각에서 확인된 글자는 신장(神將)ㆍ대왕(大王)ㆍ16일(十六日)ㆍ거악(巨嶽)ㆍ특(特)ㆍ도(道)ㆍ이(而)ㆍ강(疆)ㆍ월(月)ㆍ철(徹)ㆍ영(英) 등의 30자 정도다.
이 중에서도 '신장'이라는 글자는 사천왕사 목탑터 출토 녹유전에 표현된 조각의 정체와 관련해 비상한 주목을 끈다. 그동안 이 녹유전 조각에 대해 신장의 일종인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보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의 학설과 사천왕(四天王)으로 간주하는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주장으로 크게 엇갈렸다. 하지만 이번에 통일신라시대에 작성한 사천왕사 추정 사적비에 '신장'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녹유전의 정체는 '신장'일 가능성이 한층 커질 것으로 보인다.
<201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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