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나라 가는 길 - 경주 낭산 현중생사 석조물
'부처님 나라 가는 길'은 경덕왕의 불국사 행차길이다. 불국사를 조영한 경덕왕은 왕궁인 월성에서 낭산과 형제봉을 거쳐 불국사로 갔을 것이다. 이 길을 되살려 걸어가 보기로 했다. 경주분지의 동쪽에 자리잡은 낭산(狼山). 그 모습이 마치 이리가 엎드린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낭산은 높이 104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신라의 진산(眞山)이며 영산(靈山)이다. 산인가 싶을 정도로 위엄도 부담도 없어 어느 동네의 정겨운 뒷산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그렇지만 낭산에는 많은 전설과 역사유적·문화재 등을 간직하고 있다. 낭산은 신라시대이래로 영산(靈山)이었다.
▲석탑지붕돌
○十二年, 秋八月, 雲起<狼山>, 望之如樓閣, 香氣郁然, 久而不歇. 王謂: 是必仙靈降遊, 應是福地. 從此後, 禁人斬伐樹木.
12년 가을 8월, 낭산에 구름이 피어올라 누각처럼 보였고, 향기가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스러운 땅이라고 하여, 그후로 이 곳에서 벌목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전>
그후부터 이곳을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른다. 신유림은 신들이 유(遊)하는 숲이다. 유(遊)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아주 다른데, 보통은 놀러가다라는 요즈음의 의미를 많이 따르지만 일부의 의견이지만 종교적 성소(聖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신들이 머무는 성스러운 숲이라는 개념이다. 그 신들이란 아마도 호국신(護國神)이었으리라.
낭산의 서쪽 기슭에 중생사(衆生寺)가 있다. 현재의 절 이름이 중생사이지만 삼국시대의 절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조(三所觀音衆生寺條)와 천룡사조(天龍寺條)에 나오는 중생사의 이름을 빌렸을 뿐 실제 중생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절이다. 다만 이곳이 삼국유사의 중생사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이는 현재 박물관의 뜰에 서있는 낭산관음보살입상이 있던 곳이 이곳이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영험이 많기로 유명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석탑재
신라하대의 절터에 선덕여왕릉을 보수한 안순이 보살이 개인 사찰을 세우고 선덕사(善德寺) 또는 선덕정사(善德情舍)라고 하던 것을 도문스님이 매입하여 중생사로 바꾸었는데 삼국유사의 중생사로 오인할 가능성이 높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삼국시대 중생사(衆生寺)에는 영험(靈驗)이 뛰어난 관음보살이 계셨다.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백률사의 관음보살과 함께 신라시대 3대 관음보살로 일컬어진다. 먼저 천룡사를 중건한 최은함이 경애왕 때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의 영험이다.
○천룡사를 중건한 최제안은 부처님과 깊은 인연으로 태어났다. 제안의 증조부인 최은함(崔殷 )은 신라 55대 경애왕 때의 사람이다. 그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슬퍼하여 중생사의 관음보살 앞에 지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이 있어 은함의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다. 은함의 부부는 감격하여 부처님께 감사하며 소중하게 아이를 키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기가 태어난 지 석달 만에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와서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신라왕은 견훤에게 목숨을 빼앗겼고 후백제의 군사들은 서울장안에 들어와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최은함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들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때 은함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중생사의 관음보살상 앞에 엎드렸다.
"이웃나라의 군사가 별안간 침입하여 일이 이미 급했는데 어린 자식이 누가 되어 함께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일, 참으로 대성이 점지해주신 자식이라면, 원컨대 대자의 힘을 빌어 덮어 주시고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로 하여금 다시금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세 번 울고 세 번 고하고는 포대기에 싼 아기를 관세음보살 발아래 내려놓고 칼을 들고 싸움터로 나갔다.
▲석탑재
그후 보름이 지나서 적병들이 물러가니 싸움은 끝났다. 은함은 곧 바로 중생사로 달려왔다. 정신없이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관음전의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향탁 아래서 아기가 처음과 같이 잠자고 있었다. 살결은 금방 목욕한 듯 정결하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물씬 나고 있었다. 은함은 너무나 감격하여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고 아기를 안고 돌아와서 길렀다.
이 아이가 장성하매 총명과 지혜가 뛰어났다. 이가 바로 승로(丞魯)이니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가 낭중 최숙(崔肅)을 낳고 숙이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으니 이로부터 자손이 끊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조>
또 신라 멸망 후 7~80년 후 쇠락해 가던 중생사를 일으킨 스님의 이야기이다.
○통화 10년(992) 3월에 중생사의 주지인 성태(性泰)가 보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자가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스럽게 예불을 올려 밤낮 게으른 적이 없었지만 이 절에는 전토(田土)에서 나는 것이 없으므로 향화(香火)를 이을 수가 없는 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갈까 하여 와서 하직하나이다"하였다. 이날 잠깐 조는 동안 비몽사몽간에 보살이 이르기를, "대사는 아직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받아서 재 드리는 비용으로 쓰게 하리라" 하니 중이 흔연히 깨닫고 드디어 떠나지 않았다.
그후 열사흘 만에 웬 사람 둘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정 대문 앞에 당도하였다. 중이 나가 "어디서 오느냐?" 하고 물으니 "우리는 금주(金州) 땅 사람들인데 얼마 전에 한 중이 우리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경주 중생사에 살았는데 네 가지 어려운 일(四事·불교에서 주거, 의복, 음식, 탕약을 말함)로 하여 권선을 하고자 여기에 왔노라' 하므로 이웃 마을에서 시주를 거두어 쌀 여섯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왔소" 하였다.
▲연화하대석
중이 말하기를, "이 절에서는 권선한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이 아마 잘못 들은 것이리라"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여 "요전에 왔던 중이 우리들을 데리고 저기 우물가까지 와서 말하기를, '절이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하기에 우리들은 뒤쫓아 왔소"라고 하였다.
절의 중이 그들을 인도하여 법당 앞까지 들어왔더니 그들이 보살 화상을 쳐다보고는 서로 말하기를, "이가 권선하던 중의 화상이다" 하고 놀라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리하여 해마다 절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계속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하루 저녁은 절 대문에 불이 나서 동리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끄는데 마루에 올라가 보살화상을 찾았으나 간 곳이 없더니 어느 틈에 벌써 마당에 서 있었다. 화상을 누가 내어놓았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래서 보살님의 영험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1173) 연간에 점숭(占崇)이라는 중이 이 절에 주지로 있었는데, 글은 알지 못하나 성질이 순박하여 예불에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떤 중 하나가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친의천사( 衣天使·불교에서 옷을 시주한다는 천사)에게 호소하기를,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받드는 곳이기 때문에 글을 할 줄 아는 자를 뽑아 부지를 삼는 것이 마땅하오이다" 하니 천사가 옳게 여겨 점숭을 시험해보고자 당장 불교 의식문을 거꾸로 주었더니 그는 그대로 넙죽 받아 펴들고 거침없이 읽었다.
천사가 명심하고 있다가 방안으로 물러나와 다시 읽어보라고 하였더니 점숭이 입을 봉하고 말이 없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대사는 보살님의 돌보심을 많이 받고 있다" 하면서 결국은 그의 자리를 빼앗지 못하였다. 당시 점숭과 함께 거쳐하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그 고장 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였으므로 이것을 적어서 전한다.
<삼국유사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 衆生寺)조>
▲팔각석조대좌
중생사는 고려 말 왜구가 경주에 침입하면서 영흥사와 함께 불타면서 법등이 꺼졌다. 신라시대의 중생사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경주시내일 가능성은 남아있다. 현 중생사에는 불상대좌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신라말 고려초로 여겨지는 석조물이 남아있다. 불상 중대석에는 입상조각 12기가 새겨져 있다. 장충식은 이를 12지신상으로 보고 그 위에 있었을 불상은 약사여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12지신상이 아니라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삼단팔각연화대좌는 9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석탑재 역시 규모로 보아 9세기 후반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절터는 9세기 후반에 창건된 사찰일 것으로 추정된다.
<201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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