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낙양 용문석굴(龙门石窟 , Lóngmén shíkū)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남쪽 약 14 km 지점 '이허(伊河)' 강기슭의 높은 곳에 있는 석굴사원이다. 이곳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 중국 석굴사원들이 모여 있다. 중국의 불교문화 뿐 아니라 빼어난 건축, 조각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용문석굴은 이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용문산과 향산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육조시대의 북위(北魏:386~536) 때에 건축을 시작하여 6세기와 당대(唐代:618~907)까지 산발적으로 공사가 계속되었다. 494년 북위가 수도를 평성(平城: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에서 남쪽 뤄양으로 옮긴 후, 수십 년에 걸쳐 운강[雲崗]에 석굴사원을 건축한 대역사를 본받아 시작한 것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입구
▲용문석굴(龍門石窟) 입구
▲용문석굴(龍門石窟)
북위는 북조를 통일하면서 이에 걸맞게 고도 낙양으로 493년에 수도를 옮긴다. 효문제(471~498)는 평성에 있던 갖가지 시설들을 이전하면서 북위 최대의 사찰 영녕사도 옮겼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던 운강석굴은 옮기지 못하고 낙양 남쪽 이허강가 용문절벽에 용문석굴을 조성한다. <낙양가람기>에는 태무제를 제외한 북위의 역대황제들이 불사(佛事)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 나머지, 수도를 옮기기 전에 42사에 불과하던 불교사원이 수도를 옮긴 지 불과 39년 뒤인 532년에는 1,367개의 사찰이 고도 낙양에 즐비하게 들어섰다고 적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휘장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
불사 붐이 일어남에 따라 용문 단애에 굴을 개착하기 시작한 이는 다음 황제인 선문제(499~515)였다. 처음에 선문제는 운강보다 거대한 300척의 굴을 뚫을 계획이었으나, 석질이 운강의 사암과 달리 꽤 단단한 석회암이었기 때문에 5년이 지났는데도 겨우 230척 정도 밖에 진척되지 않을 정도로 난공사여서 석굴 조영 계획을 훨씬 축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용문의 협곡은 동산과 서산이 마주 보는 사이로 형성된 골짜기로 이수강을 사이에 둔 양 언덕인 동산과 서산에 각각 석굴이 개착되었는데, 동산은 향산이라고도 부르는 371.8m 높이의 산으로 절경으로 이름난 향산사와 간경사굴 등이 잇으며, 서산인 용문산에는 307.6m의 암산단애에 용문의 주석굴군이 배치되어 있다.
▲이허(伊河)
▲이허(伊河)
▲이허(伊河)
동 서산 석굴군의 총수는 1,352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되었고, 내부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되어 있다. 대동의 운강석굴과 돈황의 막고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이곳은 특히 예술성이 높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작은 굴 안에 불상이나 불탑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은 10여m가 넘는 것부터 수cm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이다. 10만 여점이 넘는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에 뛰어난 솜씨와 멋을 자랑하고 있다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덜어져 나간 불상이 특히 많고, 도굴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다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 흔적도 뚜렷하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에 새겨진 수많은 석굴조각들은 운강석굴의 불보살들과는 다른 새롭고도 획기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운강6동에서 보이는 것처럼 얼굴과 불의(佛衣)에 나타났던 중국식으로 변모된 특징이 이곳에서 완전히 정착되고 완성된 것이다. 용문을 개착한 초기의 굴들, 즉 빈양동과 고양동에 새긴 불상들은 당대 불상미를 대표하고 있다. 용문석굴을 조성한 조각가들은 한(漢), 위(魏) 이래의 전통적 기법을 익힌 사람들이엇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도 낙양은 서진 때 철저히 파괴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때까지 옛 조각의 전통이 남아 있엇거나 또는 그 후예들이 조각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남조로 피난갔던 조각가들이 귀환하여 남중국에서 개발하기 시작한 새로운 중국식 양식을 유입시켰을 것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
중국적인 조각이 부활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불상양식을 창조한 새로운 조각가들이 용문석굴의 불상들을 열심히 쪼고 다듬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용문석굴의 바위질은 검은 청색의 단단한 석회암이어서 용문식 불상과 같은 정교하고 예리한 불상을 만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조각은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고요하고 우아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훤씬 적합했던 것이다. 용문에 있는 북위 때의 석굴들은(유명한 구양[古陽] 석굴과 빈양[寶陽] 석굴 포함) 꾸밈새가 더욱 치밀하고 조상(彫像)이 더욱 복잡하며, 또한 단단한 돌에 가벼운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정밀하고도 우아하게 다듬어져 있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의 원형은 중국 학자들이 입던 의상이며 그 옷의 주름이 평평하게 조각된 몸체 위를 물결이 흐르듯이 덮고 있다. 이 양식을 운강 양식과 구별해서 용문 양식이라 부른다.
▲석탑(石塔)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에 조각된 불상들은 북위(500~540)와 당(640~710) 때 집중적으로 조성된 작품들이다. 이 시기에는 명문불상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시대에 따라 불상들의 주제가 변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석가와 미륵불이 많이 조성되다가 후기인 당나라 때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이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이는 북위가 현세에 통일된 이상적 불국토를 건설하고자 한 사실과 당이 내세의 안락을 추구하려 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불상을 통해서 불교사나 당대의 사상적 흐름을 파악할 수도 있다. 용문석굴의 조각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새로운 화화양식(華化樣式)의 대표작이자 전형적인 특징을 창조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중심고도인 낙양에 자리잡고 있어서 중화족의 이상미가 가장 잘 표현된 석굴이라 할 수 있다. 자 이제 용문석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향산사(香山寺)
▲향산사(香山寺)
용문석굴 강 건너 비파봉(琵琶峰)의 백원(白園)에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잠들어 있다. 일생동안 술을 즐기며, 시를 사랑하고, 청빈하게 살다간 백거이는 노년을 용문에서 보냈다. 향산사(香山寺)를 개보수하고, 수많은 불상이 점점이 박혀 있는 이허 건너편의 바위벽을 바라보며 시심에 잠겼다. '향산거사'로 불리던 백거이는 74세 때 구로당(九老堂)에선 '향산구로회'를 열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백거이에 앞서 향산사는 측천무후와 인연을 맺는다. 측천무후는 1300여년 전인, 690년 당나라 예종을 폐위하고 자신을 황제라 칭한 뒤 나라 이름도 '서주(西周)'라 바꾸고 장안에서 신도(神都, 현 낙양)로 천도한다. 이궐의 산수를 즐겼고, 특히 청유아치(淸幽雅致)의 품격을 지닌 향산사를 좋아해 이곳의 석루(石樓)에서 '용문시회'를 열곤했다.
▲향산사(香山寺)
<2010.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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