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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관림(关林, Guānlín)

蔥叟 2010. 9. 29. 06:39

중국 낙양 관림(关林, Guānlín)

 

   관림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수급이 묻힌 곳이다. 관림은 중국에서 공자의 묘 공림(孔林)과 함께 이림(二林)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무예와 재물의 신으로 숭상받고 있다.

 

   서기 182년, 중국은 후한(後漢) 말로 혼돈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해, 복사꽃 흐트러진 동산에서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세사람이 형제의 의를 맺엊다. 유명한 '도원(桃園)의 결의'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서기 219년, 유비는 우여곡절끝에 한중왕에 오르고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에 올라 형주(荊州)를 지키고 있었다. 

  

▲관림무루(關林舞樓)

  

▲천추감(天秋鑒) 편액

  

   그때 위왕 조조는 도읍인 허도(許都)를 다른곳으로 옮길 것을 고려할 정도로 관우를 두려워 하던중 사마의의 의견에 따라 오나라 손권(孫權)을 부추겨 함께 관우를 공격하고자 한다. 이에 손권은  도리어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켜 유대를 강화하고 조조를 경계하려 하였다. 그러나 관우는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 보낼 수 있겠는가!"하고 모욕을 주며 거절하였다. 화가난 손권은 여몽을 총도독으로 삼아 형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대문

 

▲관림 안내도

 

 

 

의문(儀問)

  

   관우가  위(魏)의 공격을 받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형주성을 비운사이 오(吳)나라의 여몽은 지략으로 형주성을 빼앗는다. 관우가 뒤늦게 형주를 되찾으려 하나  형주성에  가족들이 볼모로  있는 관우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졌고  도망병이 속출했다. 더구나  미방과 부사인 등  배반하여 제때에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관우는  단 200여기로 적진을 뚫고 나가다가  호북성(湖北省) 선창(宣昌)근처의 당양(當陽)에서 오나라 장수 반장의  부장인 마충(馬忠)의 군사들에게  양아들인 관평(關平)과 함께 사로잡히고 만다. 

 

▲종루

  

▲종루(钟楼)

 

 始建于明万历二十五年(公元1597年)

 

▲고루(鼓楼)

  

建于明万历二十五年(公元1597年)

 

▲고루(鼓楼)

  

   손권은 관우의 무예와 용맹을 아깝게 생각하여 항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관우는  "나는 유황숙님과 도원에서 결의를 맺은 이후, 그 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몸이다. 잔소리말고 죽여라!"  하고 거절했다. 그래도 손권은 관우를 살려두어 장수로 삼고 싶어했으나,측근들의 간언에따라 관평과 함께 참수하였다. 관우 나이 58세로  서기219년인 동한(東漢) 건안24년 10월이었다.

 

▲비(碑)

 

▲비(碑)

 

▲비(碑)

 

   관우를 참수한 손권은 유비가 조조와 동맹을 맺고 복수하러 올것이 염려되자 관우의 목을 당시 낙양에 있던  위왕 조조(曺操)에게 스스로 신하의 예를 갖추어 바치고, 몸은 당양에 정중히 묻어주었다. 유비에게는 조조의 뜻에 의해 참수한 것 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조는 손권의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던 관우를  도리어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침향목(沈香木)으로 몸체를 깎아 목에 붙인 뒤  제후(帝候)의 예로 낙양의 남쪽에 안장했다. 그곳이 바로  관림이다.  

 

▲대전(大殿)

  

▲대전(大殿)

 

   그러나 중국에는 이곳을 제외하고  관묘가 세개가 더 있다. 하나는 관우의 시신이 안장된 호북성 당양이고, 나머지 둘은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해현(解縣)과 당시 촉나라의 도읍이었는 사천성 성도(成都)에 있다. 이곳들은 관우의 의복 등을 묻어 놓은 것이다. 이를두고 "머리는 낙양을 베게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이 생겼다.

  

▲관우좌상

 

▲관우좌상

 

▲관우좌상

 

▲관우좌상

 

   관림 정문앞 광장 남단에 서있는 누각식 2층건물인 관림무루(關林舞樓)는 청대의 건륭황제때 산서성 상인들의 시주로 건립한 누각이다. 관제묘(關帝廟)라고 불리는 관림! 관림은 관우(關羽)의 수급이 묻혀있는 묘에 불과한데 묘(墓)라 하지않고 '림(林)'자를 붙인 것은  의를 지킨 역사적인 인물 관우에 대한  예우 때문이다. 중국에는 무덤마다 붙이는 칭호가 다르다. 일반 백성의 묘는 '분(墳)'이라 하고, 귀족의 묘는 '총(塚)'이라 하며, 황제의 묘는 '능(陵)'이라 하고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 하는 것이다. 수천년 역사의 중국에도  '림(林)'은 오직 "이림(二林)"이 있을 뿐이다. 바로 무성(武聖)으로 불리는 관우의 묘'관림'과 문성(文聖)인 공자의 묘'공림(孔林)'이다.

 

▲왕보(王甫)와  관평(关平)

 

▲요화(寥化)와 주창(周倉)

  

   중국인들의 관우 숭배사상은 대단하다. 상당히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국인도 관운장을 말할때는 우리처럼 관우나 관운장이라 하지 않고 관공(關公)이라고 높혀 부르고 있다. 명나라 영락황제 등 위정자들이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점도 있지만, 옛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시대의 영웅과 도덕의 모범으보았기 때문이다.

▲벽화

 

▲벽화

   

▲벽화

  

   이렇게 평가된 관우는 민간의 숭배대상이 되었고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말기까지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王),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신(神)까지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에서는 천존(天尊), 유교(儒敎)에서는 성인(聖人), 불교(佛敎)에서는 부처(佛)로 불리워 왔는데, 현대의 중국인들은 관우를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있다.

▲이전(二殿)

 

▲광소일월(光昭日月) 편액

  

   낙양의 관림은  처음에는 무덤만 하나 있었으나 1592년 명나라때  이곳에 사당을 짓고 측백나무를 심으면서 마침내 성역화했다. 그 후 청대 건륭황제 시기에 건물을 증축하여 150여칸이나 되는 현재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관림대문을 넘어서니 마당이 나오고, 그 앞에 또다른 대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 대문은 명대(明代)때의 대문으로 지금은 의문(儀問)이라고 한다. 이 의문을  지나니  배전(拜殿), 또는 평안전(平安殿)이라고 불리는 대전(大殿)이 보인다. 의문을 넘어 대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양편에는 사자얼굴을 조각해 놓은 돌기둥과 난간이 있다. 이 기둥들에는 모두 리본 같은 붉은천들이  걸려있는데 자녀들의 무운을 비는 의미라고 한다.

  

▲이전(二殿) 관우상

 

▲이전(二殿) 관우상

 

   대전 못 미쳐 좌우에는  벽돌로 만든 정방형의 건물이 있다. 청대에 지은 '분향로'라고 하는데 대전의 화재를 예방하기위해 이곳에서 향을 피운 것이다. 대전은 유리기와로 만든 궁전식 건물이다. 이 대전 입구 좌측에  80근이나 나가는 청룡언월도 를 세워놓았다. 관운장이 쓰던 무기의 모형물이다. 대전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6m높이의 관우 좌상이 있다.  몸에 용포(龍袍)를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쓴 신성하고 근엄한 제왕(帝王)의 모습이다. 좌측은 요화(寥化)와 청룡언월도를 들고있는 주창(周倉)이 서있고 우측은 왕보(王甫)와  패인(牌印)을 들고 양자(養子)관평이 시립하고있다. 주창과 왕보는 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맥성(麥城)에서 함께 자결했던 부장들이다.

 

▲이전(二殿) 관우상

  

▲이전(二殿) 동장벽화

 

▲이전(二殿) 동장벽화 설명

 

   대전을 지나면 청나라 광서황제가 쓴  '광소일월(光昭日月)'이라 현판이 붙어있는 '이전(二殿)'이 나온다. 이 전각에는 좌우 벽에 화려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이전(二殿)'동측에는  배전(配殿)으로 관우의 부인인 호(胡)씨를 모신 전각이 있다.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중앙에 있는 분이 부인 호씨이다. 서측 배전(配殿)은 오호전(五虎殿)으로  그곳은 촉의 오호대장이던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삼전(三殿)은 춘추전으로 관우가 수면을 취하고 있는 모습의 상을 모셔놓은 곳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침전(寢殿)'이라고도 불렀다. 또 이곳에는  관우가  의자에 앉아서  춘추(春秋)를  보고 있는 모습의 좌상이 있다. 춘추는 관우가 즐겨 보던 춘추시대 공자(孔子)가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다.

 

▲이전(二殿) 서장벽화

 

▲이전(二殿) 서장벽화 설명

   

   삼전을 지나니 드디어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관우의 수급이 묻어있는 묘 앞에는 두개의 석패방(石牌坊)이 일주문처럼 서있다. 앞의 것은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 쓰여있고 뒤에는 중앙완재(中央宛在)라 쓰여있다. 한수정후는 관우가 조조휘하에 잠시 있을떄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에게 하사받은 벼슬이다. 관우의 수급이 잠들어 있는 묘역은 담장이 쳐있는데 특이한 것은 묘위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죽어서도 나무 그늘 밑에서 시원하게 지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장숭고(氣壯嵩高) 편액

 

 

 

<2010.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