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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용문석굴 빈양중동(宾阳中洞, Bīnyángzhōngdòng)

蔥叟 2010. 10. 1. 05:53

중국 낙양 용문석굴 빈양중동(宾阳中洞, Bīnyángzhōngdòng)

  

北魏(500~523年) 營造, 正壁释迦牟尼佛及二弟子, 二菩萨, 南北壁均一立佛二菩萨, 造像三世佛题材, 地面莲花宝池. 窟顶莲花藻井, 八身飞天. 前壁刻佛传故事和皇帝, 皇后礼佛图.

  

 빈양중동(宾阳中洞, 第140窟)

   

   빈양동은 동굴이 3개가 있어 <빈양3동>으로도 불린다. 동굴은 파기 시작한 북위 시절에는 영암사로 불렸으며 명청시대 이후로는 빈양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빈양동은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들 가운데 한 분인 여동빈(呂洞賓)의 자 동빈(洞賓)과, 호 순양자(純陽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여동빈은 도가 사상 가장 유명한 신선으로 꼽힌다. 여동빈이 민중의 두터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민중들 속에 살면서 민중의 소원을 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빈양중동은 당시 사원에서 유행하던 방식으로 불상과 조각을 배치한 것으로 북위의 석굴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가모니불(释迦牟尼佛)

 

   빈양동의 개착은 천5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500년 북위의 선무제(500~515년)는 아버지 효문제(471~499년)와 어머니 문소황태후를 모시기 위해 빈양중동과 빈양남동을 조성한다. 선무제 사후에 효명제(516~528년)가 선무제를 위하여 다시 하나의 석굴을 조성한다. 이것이 빈양북동이다. 523년에 이르러 빈양중동이 완성됐고, 빈양남, 북 동굴은 수, 당 시대까지 조성작업이 계속되었다.

 

   용문석굴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중국 선비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고(372년, 소수림왕), 이불란사와 성불사(375년 전후)가 건립되면서 한반도에 불교의 싹이 틀 무렵, 유목민들의 근거지인 중국대륙 북쪽에서는 선비족의 영웅 탁발규(태조)가 5호16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위를 수립(386년)한다. 태조 도무제(386~408년)를 이어 명원제(409~423년), 태무제(424~452), 문성제(452~465), 헌문제(466~470), 효문제(471~499), 선무제(500~515), 효명제(516~528) 순으로  제위를 이어간 북위는 서기 534년 동위,서위로 분열하면서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석가모니불(释迦牟尼佛)

 

   삼무일종의 법난 중 첫번째 법난을 저지른 군주가 태무제고, 태무제의 과오를 뉘우치고 운강석굴을 개착하면서 불교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군주가 문성제이다.  그리고 493년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용문석굴을 조성하면서 한족 동화를 자처한 군주가 효문제이다.

 

   빈양 3동 가운데 가장 규모를 잘 갖춘 곳은 빈양중동으로 높이와 넓이, 진입 깊이는 모두 11m이다. 석굴 안에는 11존의 대형 불상이 조성돼 있다. 정면의 주존 “현세불”은 석가모니로 높이 8.4m, 헐렁한 가사를 입고, 결가부좌 한 체로,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 바닥을 앞쪽으로 향해 세우고, 왼손은 3개의 손가락을 구부리고 검지를 바닥으로 향해 있다. 설법하는 모양의 ‘설법인’ 이다. 석가모니 양쪽의 얼굴 부분이 훼손된 조각상은 2명의 제자로 모두 도굴 당한 흔적이다. 이 조각상들의 머리는 일본으로 반출됐다고 한다.

  

▲연화조정(莲花藻井)

 

   빈양동이 주목받는 것은 그 벽면에 조각된 유명한 불교 설화이다. 위에서 부터 첫 번째 층은 유마힐 이야기, <유마의 변>을 조각했다. 유마는 학문이 깊고 박식한 부처의 속가 제자이다. 유마거사가 병이 났다. 석가모니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보냈다. 이 벽화부조는 바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변론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유마는 손에 먼지떨이를 쥐고, 책상 위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양 옆으로 두 명의 시녀가 서 있다. 반면에 문수보살은 구슬로 장식한 왕관을 쓰고, 손을 들어 가슴 앞에 대고, 연화대 위에 앉았다. 옆과 뒤에 사리불과 제자 2명이 있는데, 마치 두 사람이 바로 토론에 몰입돼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그림은 당시 사회의 문인, 사대부가 탐욕 없는 담론을 숭상하는 사회 풍조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윤회와 열반, 번뇌와 보리, 예토와 정토의 구별을 떠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의 경지를 체득해야 함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남벽일입불이보살(一立佛二菩萨)

 

   두번째 층의 조각은 <살타나 태자 본생>과 <수달나 태자 본생> 이야기이다. ‘본생’은  석가모니의 전생을 말한다. 살타나 태자와 수달나 태자 모두 석가모니의 전생 인물이다. 고대 인도의 가마라타 국왕의 3째 아들인 살타나는 굶주리는 호랑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져 굶주리는 호랑이 식구의 먹이가 된다. 벽화에는 1마리 큰 호랑이와 6마리 새끼 호랑이가 있다. 작은 능선의 수목 사이로 한 사람이 누워 있다. 누워 있는 사람 뒤로 절벽이 그려져 있다. 고대 인도의 엽파국(葉波國?) 국왕의 아들인 수달나는 선한 일과 보시를 좋아했다. 자신의 나라가 전쟁에서 가까스로 얻은 보물 상아를 적국에게 보내 버리자 분노한 국왕이 수달나 태자를 추방해 버렸다. 그러나 태자는 보시를 중단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처자와 자신까지 남에게 줘 버렸다. 끊임없는 보시행은 결국 국왕과 적국을 감동 시켰다. 국왕은 그를 다시 맞아 들였고 적국에서도 다시 보물 상아를 보내왔다. 양국은 평화와 우의를 되찾았다. 이 두 벽화는 생사윤회와 선악과보의 교훈을 설명한다.

 

▲북벽일입불이보살(一立佛二菩萨)

  

   세번째 층은 제후예불도(帝后禮佛圖) 부조 벽화로 북위 효문제와 소명황후가 성대한 의식으로

예불을 드리는 장면이다. 북쪽 벽면은 ‘황제 예불도’, 남쪽 벽면은 ‘황후 예불도’이다. 그러나 이 두 부조는 1935년 도굴된 뒤 지금은 미국 뉴욕 메트로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자리에서는 대형사진이 걸려있다. 빈양중동 벽면에는 많은 보살과 제자들이 법문을 듣는 장면을 표현한 그림이 장식돼 있다. 석굴 중앙 천정에는 동굴내 주존불을 덮어주는 연꽃보개가 조각돼 있고, 연화대 주변으로 8명의 주악천인상과 2명의 천인이 공양하는 모습을 조각했다. 이들은 ‘향음신(香音神)’으로 불린다.

  

 ▲역사상

 

 

 

<2010.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