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宁寺是北魏后期都城洛阳的重要佛寺故址。当时位于北魏宫城的西南侧﹐占地面积达9万平方米。它是一座以佛塔为中心的佛寺﹐是专供皇帝﹑太后礼佛的场所。永熙三年(534)被大火焚毁。
永宁寺遗址中央﹐迄今尚存塔基遗迹﹐为高大的土台﹐当地俗称木宁寺或木塔寺﹐清代误定为陵冢﹐树“汉质帝静陵”碑﹐至今碑石犹存。遗址于1963年由中国科学院考古研究所勘察﹐1979~1981年发掘。
중국 낙양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永宁寺)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낙양에 있던 크절이다. 북위가 멸망할 때 소실되었다. 영녕사에는 고대 중국 최고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9층탑이 있었다. 탑의 높이가 90장이고, 그 위에 다시 10장 높이의 상륜부가 있어서 100리 성밖에서도 탑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 1천 척은 지금의 단위로 환산해도 136.7미터에 이르는 6세기 초에 세워진 건축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한 규모의 불탑이었다. 영녕사는 북위 후기에 해당하는 희평원년(熙平元年, 516)에 영태후 호씨(靈太后 胡氏)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건립된 지 20년이 조금 더 지난 영희(永熙) 3년(534)에 소실되고 말았다. 영녕사 유적지는 하남성 낙양시 동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한위낙양성지(漢魏洛陽城址) 안에 있다. 영녕사는 후기 북위 도성이었던 낙양의 중요한 불교사찰로 당시 북위 궁성의 서남쪽에 세워졌으며, 전체 면적이 9만 평방미터에 달했다. 영녕사는 불탑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었으며, 황제와 태후가 예불을 올리는 황가전용의 사찰이었다.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북위 불교가 정점에 달한 시기는 영태후(灵太后) 호씨(胡氏)가 수렴청정하던 효명제(孝明帝, 재위 515~528) 때였다. 515년 선무제가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6살의 효명제가 등극했고, 정치는 자연스레 선무제의 황비인 영태후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당나라의 측천무후에 비길만한 여인이었다. 이 영태후가 이룩한 가장 두드러진 불교활동은 낙양에 영녕사(永宁寺)를 건립한 것이었다. 영태후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의 낙양불교는 양현지가 남긴 <낙양가람기> - 북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3년부터 도읍을 다시 '업'으로 이전한 534년까지의 40여년 동안을 다루고 있다 - 에 잘 정리돼 있는데,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북위 불교가 한창 빛날 무렵 1,367개의 사찰이 낙양에 건립됐다. 당시 낙양의 인구는 50~60만, 약 10만 9,000호의 집이 있었다.
수많은 사찰 중에서도 영녕사는 단연 돋보이는 사찰이었다. 영녕사 9층탑은 높이가 90장에 이를 정도였다. <낙양가람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탑 위에는 십 장 정도의 금찰(金刹)이 있어 백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 그때 마침 중국에 들어온 보리달마 스님도 이 탑을 보았다. "당시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파사국 사람이었다. 멀리 변방 지역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를 유람하다가 탑의 금반에 해가 비쳐 광채가 구름 위에까지 퍼지는 것을 보고, 바람에 보탁(宝铎)이 흔들려 하늘 밖까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보리달마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150살이 되도록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가보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이 사찰은 매우 정치하고 아름다우니 염부(阎浮, 인도)에도 입으로 연신 나무(南无)없을 것이며, 부처님 세계에도 없을 것이다.'를 읊조리고 합장했다."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성(盛)이 다하면 쇠락한다고 했던가. 영희 3년(534) 2월. 영녕사에 불이 났다. <낙양가람기>엔 그때 상황도 나온다. "효문제가 능운대에 올라 불이 난 곳을 바라보며 남양왕 보거와 녹상거사 장손치에게 우림군 1,000명을 이끌고 불을 끄게 하고는 매우 슬피 울었다. 처음 동이 틀 무렵 탑의 8층에서 불이 크게 났지만, 그 때는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매우 어두웠고, 싸라기눈도 섞여 내렸다. 슬퍼하는 소리가 낙양에 진동했다. 불은 3월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땅 속으로 들어가 기둥을 다 태우고 한 해가 지나도록 연기가 났다." 업으로 천도한 지 몇 년 뒤인 547년 양현지가 다시 낙양을 방문하니 "폐허와 잿다니들, 여우굴과 소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만 남아있었다." 고 전한다. 다음은 영녕사 목탑유지의 안내문이다.
永宁寺是北魏最豪华的皇家寺院, 建于北魏熙平元要年大三分(公元516年). 据<洛阳伽藍记>记载,, 永宁寺四面皆筑有围墻, 墻上施有木短椽, 椽上覆瓦, 和当时皇宮宮墻的形制完全一样. 四面寺门尤以向南正门最为高大峻拔, “门楼三重通三道, 去地二十丈”, “图以云气, 画彩仙灵, 列钱靑琐, 輝赫丽华”, 围墻之外, 绿水环绕, 靑槐婆娑. 寺內北部的佛殿, “形如太极殿”, “作功奇巧, 冠于当世” 据实测, 永宁寺遗址南北长305米, 东西宽215米, 比今日声显赫的 “释源” 白马寺还要大三分之二. 平面布局为当时流行的以塔为中心, 前塔后殿样式. 寺內僧房楼观达一千余间.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永宁寺的主体建筑卽位于寺院中部偏南的永宁寺木塔. 木塔起建建于北魏孝明帝熙平元年, 于孝明帝神龟二年(公元519年)建成, 九层, 四方形, 据记载,, 塔高 “四十九丈”, 折今136.71米. 比现存辽代应县木塔(高67.31米) 高出兩倍多, 旦早了五百多年. 永宁寺木塔的第一层, 每面九间, 皆设三门六窗, 涂以朱红大漆, 在木塔的塔刹上装饰有大小 “容二十五斛” 的鎏金铜质宝甁. 宝甁之下还装有鎏金铜质承露盘十一重, 盘之周匝皆悬挂鎏金铜铎(大铃). 每至高风永夜, "宝铎和鸣, 铿锵之声, 闻及十余里".
木塔建城之后, 灵太后携七岁幼子元诩登塔眺望. 居然 “视宮中如掌內, 临京师若家庭”, 遂严禁一般人等登临. 中国禅宗初祖菩提达摩, 惊永宁寺塔 “金盘炫日, 光照云表, 宝铎含风, 响出天外”. 卽 “囗唱南无, 合掌连日”, 歌咏赞叹永宁寺 “实是神功”. 自称活了一百五十岁, 走遍了世界各地, 而 “此寺精丽, 阎浮所无也”. 北魏孝武帝永熙三年(公元534年)二月, 木塔为雷电所击. “火经三月不熄, 有烟人地寻柱, 周年犹有烟气".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据考古发屈证实, 木塔基座作正方形, 长, 宽各约38.2米, 高2.2米, 內为夯土, 四壁以靑石镶包, 好象一座靑石台基. 台基四面皆置 “漫道”, 以供人上下. 木塔底层用一百二十四根方柱构成, 分作五圈排列. 第五圈卽 最外圈为 “檐柱”, 第四圈为 “明柱”, 第三, 二圈为 “內柱”, 第一圈为 “中心柱”, 方柱之下皆垫以础石, “明柱” 以內, 均以土坯垒砌, 形成了一座土坯与木柱混合砌成的实心体. 在实心体的东, 南, 西三面, “明柱” 之间的土坯壁上, 砌有五个弧形龛.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다음 글은 중국 사이트에 소개된 영녕사에 관한 글이다.
洛阳永宁寺是在北魏后期熙平元年(516)灵太后胡氏所建,永熙三年(534)被焚毁,遗址位于今河南省洛阳市东15公里的汉魏洛阳城址内。
永宁寺是北魏后期都城洛阳的重要佛寺故址。当时位于北魏宫城的西南侧﹐占地面积达9万平方米。它是一座以佛塔为中心的佛寺﹐是专供皇帝﹑太后礼佛的场所。永熙三年(534)被大火焚毁。
永宁寺遗址中央﹐迄今尚存塔基遗迹﹐为高大的土台﹐当地俗称木宁寺或木塔寺﹐清代误定为陵冢﹐树“汉质帝静陵”碑﹐至今碑石犹存。遗址于1963年由中国科学院考古研究所勘察﹐1979~1981年发掘。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주초부분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토벽
建筑遗迹
寺院围墙经勘察﹐平面长方形﹐南北305米﹑东西260米。塔基位于围墙内正中部位﹐平面呈方形。塔北有一片较大的夯土台基遗迹﹐东西60馀米﹐建筑面积达1300平方米以上﹐为正殿基址﹐据北魏杨炫之《洛阳伽蓝记》记载﹐该殿豪华绚丽﹐可与宫廷中的太极殿相比﹐两侧向南延伸﹐连接东西廊檐。围墙内正南又有一处殿基﹐建筑面积约1000平方米。围墙南壁正中是寺院的山门﹐面阔7间﹐进深2间﹐正对著佛塔。据《洛阳伽蓝记》记载﹐门上原有门楼三层﹐通三阁道﹐去地二十丈。又记围墙的东﹑西﹑北三壁亦各有一门﹐均直对佛塔﹐东西两门各有门楼二层﹐北门无楼﹐似乌头门﹐遗迹今已不明。永宁寺遗址的山门﹑佛塔及正殿均位于中轴线上﹐而以塔为中心﹐殿在塔後﹐这是中国早期佛寺建筑的典型布局。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목주 흔적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목주 흔적
佛塔塔基
永宁寺塔为木塔﹐据《洛阳伽蓝记》记载原为九级﹐举高九十丈(《水经注‧谷水》条又记为四十九丈)﹐今仅留塔基。塔基夯筑﹐平面略呈方形﹐分上下两层。下层基座东西101米﹐南北98米﹐高度超过2.5米。在下层基座正中筑上层基座﹐平面方形﹐边长38.2米﹐高2.2米。台基四边用青石垒砌压边﹐基座四面均设踏道。原来基座四周应绕置石栏﹐现仅在其附近散见一些石栏构件。
木塔建于上层基座上﹐现尚存方形础石124个﹐分内外5圈﹐排列整齐有序﹐皆呈正方形的网格式。除外圈檐柱每柱下只置一石外﹐其馀诸圈础石皆用上下三重平石叠砌而成﹐包砌在夯土层中﹐最上重的平石刻有榫槽以使立柱固定。在第四圈础石内﹐筑成土坯垒砌的方形实心体﹐为木塔的中心柱﹐边长20米﹐残高3.6米。在其东﹑西﹑南三面各开5龕﹐每龕都设在两柱之间﹐宽约1.8米﹐进深20~30厘米﹐呈弧形。龕内原有塑像﹐今仅存残块。中心柱北面没有壁龕﹐只见方形柱槽﹐原应为支架木梯的登塔之处。
檐墙外涂丹朱﹐内绘彩色壁画。壁画内容有菩提树﹑背光和莲花化生等佛教题材。塔基地面铺有一层较厚的白灰硬面。在檐墙残基与白灰地面处﹐保存有门窗的遗痕﹐按门窗遗痕及每面10个檐柱推算﹐木塔底层外檐每面应面阔9间﹐与“三窗六门”的记载相吻合。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목주 흔적
▲영녕사 목탑유지(永宁寺木塔遗址) 벽돌 흔적
塔基遗物
有大量佛教泥塑残像﹐还有石雕﹑瓦﹑瓦当等建筑材料。佛教泥塑残像有大小两种﹐大像较少﹐有佛和菩萨造像。小像出土约300馀件﹐多为贴置墙壁上的“影塑”﹐包括飞天﹑菩萨﹑比丘以及世俗供养人像﹐有高冠大履褒衣博带的上层人物及其侍从﹑文吏和武士等。这批泥塑造型精致﹐形态生动﹐超出同时期石窟中泥塑的艺术水平﹐是北朝雕塑艺术的精品。建筑材料中﹐有饰狮子纹的贴砖﹐瓦当多为宝装莲花纹﹑变体莲纹和莲花化生等图案﹐其题材均与佛教艺术有关。 1979年对永宁寺的塔基遗址进行发掘,发现了大量佛教泥塑残像。泥塑残像分大小两种:大像较少,只有佛和菩萨像的残件,无法复原;小像较多,约 300余件,多为贴置墙壁上的影塑。塑像头高约7厘米, 体高约15厘米。全系手工塑制,泥质细腻,淘洗匀净,由于曾遭大火焚烧,现在已成坚硬的陶质。从头像看,主要内容有两类:一类是菩萨、弟子、飞天等;另一类是世俗供养人,包括众多的文武官员和男女侍仆、侍卫武士等,模拟着皇室供养佛的行列。泥塑的面貌传神,富有个性,人物的发髻、冠帽、衣袍、鞋履等,刻画得细致逼真,代表了当时泥塑艺术的最高水平。
▲포양석(包镶石)
塔基南侧残存包镶石三层共十余块, 此为最上面一块, 其余包镶石均依此规格复原.
<2010. 7. 31>
중국 낙양 용문석굴(龙门石窟 , Lóngmén shíkū) (0) | 2010.09.30 |
---|---|
중국 낙양 관림(关林, Guānlín) (0) | 2010.09.29 |
중국 낙양 백마사 인도풍격불전(印度风格佛殿) (0) | 2010.09.28 |
중국 낙양 백마사(白马寺, Báimǎsì) (0) | 2010.09.27 |
중국 언사시 당 공릉(唐恭陵, Gōnglíng) (0) | 2010.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