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전천주사터(傳天柱寺址)
경주 월지(안압지) 서쪽에는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가 세워져 있었던 축대가 남아 있는데, 이 주변지역은 신라 왕궁 안에 세워졌던 절인 천주사(天柱寺)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역 주변지역은 과거 계단식의 논과 밭으로 경작되어 왔지만, 최근 경주시에서 꽃밭을 조성하면서 지대가 낮은 논에는 연꽃을 관찰하기 위한 연밭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天柱'명 기와편과 초석 등이 출토되었고 또한 '東京雜記'에"天柱寺在月城西北其北有雁鴨池( 천주사는 월성의 서북쪽에 있다. 그 북쪽에 안압지가 있다)”라는 기사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천주사터로 추정된다.
▲전천주사터(傳天柱寺址)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10년(488년)에 천천정으로 거동을 하였다. 이 때 까마귀 와 쥐가 와서 울고 쥐가 사람말로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 했다. 왕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도록 하였다. 기사가 남쪽의 피촌에 이르러 서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어 이를 한참 살펴보고 있는 동안 까마귀가 간 곳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 한 늙은이가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을 살펴본 즉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가만 두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비처왕에게 이것을 바치니, 왕이 보고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보다는 차라리 떼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 고 하였다. 일관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을 말함이오, 한 사람은 왕을 말합니다." 라고 한 즉 왕은 그를 옳게 여겨 떼어보니 "거문고 갑을 쏘라!" 고 적혀있었다.
왕이 곧 궁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를 하 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하게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일(上午日)에 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감히 움직이는 것을 삼가하였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하여 찬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이언에는 이것을 달도라고 하니 이는 곧 슬퍼하고 조심을 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려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노인이 나온 못을 서출지라고 한다.
<삼국유사 사금갑조>
천주사의 창건연대는 소지왕과 진평왕에 의한 창건설로 구분되지만 三國遺事의 기록으로 볼때,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임에는 틀림없다. 소지왕 때의 왕실 내불당이었던 내전이 진평왕 때에 월성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지금의 천주사터로 옮겨 확대되면서 내제석궁 또는 천주사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처음 천주는 불교적인 색채보다는 신라고유의 신궁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527년 법흥왕 10년 이차돈이 순교하고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공인된 것을 천주사가 그 이전 시기에 궁내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최소한 사찰로써 천주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법흥왕 이전에도 이미 왕실에는 불교가 들어와 믿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전천주사터(傳天柱寺址)
<청태 4년 정유(937) 5월 정승 김부가 금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한 벌을 태조에게 바치니 길이가 열 뼘이요 새겨 붙인 옥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을 일러 진평왕이 '하늘이 준 옥띠'라 하였다. 태조가 이것을 맡아 안대궐 고방에 간직하였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으로 성은 김씨인데, 대건 11년(579년) 8 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이 임금이 창건한 것이다)에 행차를 할때에 석제(石梯)를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 이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의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 중의 하나이다. 왕이 즉 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말하기를 "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으니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교묘(郊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허리에 매었다. 그 후에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 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엇인가?" 좌우가 말하기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천사옥대 그 셋째입니다."
<삼국유사 천사옥대조>
옥대는 황제가 착용하던 것이다. 진평왕 이전의 신라왕들은 금제과대를 착용하였다. 황금문화가 옥문화로 바뀌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진평왕 이전 그러니까 진지왕까지는 금제과대를 착용하였다. 고분의 양식이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뀌고, 황금문화가 옥문화로 바뀌는 문화의 변혁은 6세기 후반에 이르러 복식문화의 중식식으로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짐을 알 수 있다. 또 한 쿠데타로 삼촌인 진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진평왕이 권력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위하여 천사옥대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사는 그 외에도 내원으로도 불렸다. 아래 사료의 내용으로 볼 때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19년(760) 4월 … 왕이 (월명에게) 좋은차와 수정 염주 108개를 내려주자, 문득 외양이 곱고 깨끗한 한 동자가 나타나서 차와 염주를 공손히 받아들고 궁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이를 내궁(內宮)의 사자로 여겼고, 왕은 스님의 종자로 여겼으나 서로 알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왕은 매우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이를 좇게 하였더니,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화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있었다.
<삼국유사 월명사도솔가조>
천주사는 월성 북에 있다. 속전에 진지왕이 금갑을 쏘아 거꾸러뜨림이 곧 절의 중이다. 그 북에 안압지가 있다.
<東國輿地勝覽(1477년)>
천주사는 지금의 제석궁(帝釋宮)인데 사람들이 해마다 뜰에 꽃을 심고 복을 빈다고 한다.
<東京雜記>
▲전천주사터(傳天柱寺址)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때 천주사는 내전(內殿)·내원(內院)내불당(內佛堂)·내제석궁(內帝釋宮) 등으로 불렸다. 한편 안압지(전 임해전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제 판불을 비롯한 불교신앙관련 유물들은 왕궁 안에 위치했던 내제석궁에 모셔졌던 불상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천주사에 관한 또다른 기록으로는 화랑세기 5대 풍월주 사다함조에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와 어머니인 금진낭주 관한 기록이다.
법흥왕의 후비였던 금진은 법흥왕과 밤일이 맞지않아 문천의 상류에 물러나 살았다. 구리지는 낭도를 모아 금진을 원화(源花)로 삼고자 했다. 앞서 구리지는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서 금진의 명을 전(殿) 아래에서 늘 받들었다. 구리지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원해, 천주사(天柱寺)에서 무릇 5년(536~540)을 발원했는데, 금진이 비로소 홀로 살게 되었다. 구리지는 이에 날마다 가서 원화가 될 계책을 바쳤다. 금진은 나이가 또한 적었기에 명리를 탐해 허락을 했다.
<필사본 화랑세기 5세 풍월주 사다함전>
또 한가지 기록은 사다함과 관련된 기록인데 6세 풍월주인 세종과 미실의 사랑의 라이벌인 세종조에 관한 기록이다. 사다함이 가야정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미실과 세종이 결혼한 것을 보고 실의에 빠지다 무관랑이 죽은 후 7일만에 죽고나서 세종과 미실이 천주사에서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다.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과연 미실이 꿈에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부부가 되고자 했으니, 그대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공에게 아뢰었다.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564)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해 낳은 아들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은 금지옥엽 귀한 왕족이었으나,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다.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끌어준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 6세 풍월주 세종전>
▲전천주사터(傳天柱寺址)
<201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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