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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금성ㆍ남당

蔥叟 2010. 7. 4. 05:08

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금성남당

 

   신라는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한번도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 거처하는 왕성은 서라벌 내에서 여러번 이주하였다. 신라 최초의 왕성은 금성이었다. 금성은 혁거세 당시에 처음으로 수축되었다가 자비왕 자비왕 이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한다. 금성은 기원전 37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다.

    

▲경주읍성. 금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조>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처음 혁거세 21년에 궁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제1>

 

○甲申築金城

갑신년(BC37)에 금성을 쌓았다.

 

<삼국유사 왕력 혁거세조>

 

▲경주읍성

 

   위치에 대해서는 금성 서편에 시림이 있었다는 기록과 금성의 동남쪽에 월성을 축조했다는 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 제1의 기록으로 미루어 금성을 확장한 것이 월성이라는 견해와 경주읍성 또는 그 주변이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 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혹은 재성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제1>

 

   또한 혁거세와 알영부인이 함께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남산 창림사터를, 또는 이른 시기의 경주분지내 유적분포로 미루어 보아 황성동일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사람을 받들어 길렀다.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조> 

  

▲경주읍성

 

   그러나 한편으로는 4세기 이전의 무덤분포와 출토유물로 보아 경주분지가 사로국의 중심지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어 있으므로 현재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하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남당은 삼국사기 첨해니사금 2년(249)에 의하면 궁궐 남쪽에 남당(일명 도당)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성을 확인하기 전에는 남당의 위치를 찾기란 어렵다.

 

○三年,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3년 가을 7월, 남당[도당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五年,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니사금전>

 

   남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정치의 중요사항에 대해 자문하거나 죄수들을 살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주읍성

 

 

 

<2010.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