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월성ㆍ서당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인 월성은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터만 남아 있다. 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왕경으로 본다면 왕궁으로는 특이하게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느 왕성과 달리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관련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월성은 문천(蚊川 沙川) 북안에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적인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의 형태가 반월형(半月形)을 이루고 있다. 동서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고 남벽은 자연지세를 많이 이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단애를 이루기 때문에 거의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벽 기저부까지 문천의 물이 와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고서저를 이루며 성안지반의 높이는 성 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土壘)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의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제곱m이다. 기록상 월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파사왕 22년(AD 102)이다.
▲월성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22년조>
또 만월성이라는 용어와 함께 신월성이란 이름도 등장한다. 이는 월성의 생김새가 초승달(新月)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월성해자 발굴중에 '在城'명의 와당이 출토되기도 한다.
○初赫居世二十一年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又新月城南有南山城 周二千八百四步 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 始與高句麗 百濟 地錯犬牙 或相和親或相寇 後與大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처음 혁거세 21년에 궁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이라 하였으나,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혹은 재성이라고 불렀는데, 그 둘레가 1천 23보였다.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8백 38보였다.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4보였다. 시조 이래로 사람들은 금성에 살았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두 월성에서 많이 살았다. 처음에는 고구려 백제와는 국경이 들쑥날쑥 엇갈려 때로는 서로 화친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로 침략을 하다가, 후일 당 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평정한 다음 마침내 9주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 신라>
▲월성
또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반월성'이라는 용어는 고려 명종(1170-1179)때의 학자인 김극기가 月精橋를 읊은 詩에서 이다. 이 시는 『동경잡기』 고적조에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반월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고려시대부터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반월성 보다는 원래의 명칭인 '월성'이란 용어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半月城南兎嶺邊 虹橋倒影照蚊川 蜿蜓勝漢尾垂地 螮蝀飮河腰跨天 手斬蒼蚊周處勇身成白鶴令威仙 昔賢逸跡皆警俗 慙愧區區數往還
반월성의 남쪽 토끼고개 가에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에 비추었네. 용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는 땅에 드리우고 무지개가 하수를 마시매 허리는 하늘에 걸치었네. 손으로 푸른 이무기를 베었으니 주처의 용맹이요, 몸이 백학으로 화하였으니 정령위는 신선이었다. 옛날 현인들의 높은 자취는 다 세속을 놀라게 하는데 구구하게 자주 왕래하는 나 부끄럽구나.
<동경잡기 고적조 金克己詩>
월성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 월성 안에 영빈관을 짓기 위해 부분적으로 시굴조사를 한 결과 기와가 나오자 영빈관 건축이 취소 되었고 성벽 일부가 무너져 북문과, 동문 일부가 조사되었다. 또 월성 해자가 순차적으로 발굴되면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월성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월성은 5세기 말에 조성되었고, 자연하천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출토된 기와들이 6세기 중후반에 창건된 황룡사의 기와보다 고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신라 기와의 기원을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 창건 당시의 것으로 알려졌지만 월성 해자가 발굴된 후 궁성건축물에 먼저 기와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파사왕 22년(AD 101)에 월성이 축조되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1~2세기의 기와가 출토되어야 입증이 가능하다. 명활성으로 부터 월성으로 이거하는 소지왕 10년(AD 488) 부터 월성이 정식으로 궁성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기와문화도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월성 내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성터 중간의 높다란 터와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긴 석빙고만 남아 있다. 또한 경주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고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월성의 해자에 대한 발굴이 진행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월성
신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 어 그 곳에서 아레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이내 내려와서 그 곳을 찾아가 보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 그 집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집입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므로 관가에 고했다.
관가에서 동자에게 물었다.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우리의 선조는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서 살고 있으므로 땅을 파서 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동자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빼앗 아 살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하니 이가 곧 아니부인이었다.
<삼국유사 탈해왕조>
▲월성과 남천
○16년 정미는 선덕왕 말년이며, 진덕왕 원년이었다.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하여 폐위시키려 하였다. 왕은 궁안에서 이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하였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 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
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 돌격하였다. 비담 등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삼국유사 열전 김유신전>
▲월성
월성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월성의 남쪽 성벽은 해자역활을 하던 남천에 면하고 있어 남문이 설치되려면 그 앞으로 남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어야 가능하다. 현재 월성 서쪽의 월정교와 일정교 사이에 다리 흔적이 발견된 적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남문관련기록이 있어 부정하기도 어렵다.
○六年, 春三月, 京都大雪. 王宮南門 無故自毁.
6년 봄 3월,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왕궁의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전>
○3월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을 한 사람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때 마침 큰 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納衣)를 걸치고 앵통(櫻筒)을 혹은 삼태기를 걸머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앵통의 가운데를 바라보니 다구(茶具)만이 가득하여서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왕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소" 스님이 대답하였다. "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나에게 차를 한사발 주시겠소?" 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思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요?" "그렇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거듭 절하고 굳이 사 양하고 받지 않았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월성
서문인 귀정문(歸正門)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초까지 월성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신문왕 이전의 모든 국가 행사가 월성 서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문왕 당시부터 서라벌의 중심이 서쪽에서 북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왕경의 골격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문왕이 새 왕비를 맞아들일 때 왕비는 북문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간다.
○三年, 春五月七日, 遣伊湌<文穎>,<愷元>抵其宅, 冊爲夫人. 其日卯時, 遣波珍湌<大常>,<孫文>,阿湌<坐耶>,<吉叔>等, 各與妻娘及<梁>,<沙梁>二部嫗各三十人迎來. 夫人乘車, 左右侍從, 官人及娘嫗甚盛. 至王宮北門, 下車入內.
3년 여름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 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 손문과 아찬 좌야, 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 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3년조>
▲월성
또 문무왕의 서제(이복형제)인 거득공의 이야기에도 월성과 귀정문이 등장한다.
왕이 하루는 서동생 거득공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 고 하니, 거득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 하여금 재상을 삼으시려거든 신은 원하옵건대, 나라 안 팎을 잠행하며 민간무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경중과 관리의 청탁을 알아본 연후 에 직위를 맡을까 합니다." 하였으므로 왕은 그 말을 들어주었다.
거득공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양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 -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추- 북원경-지금의 충주- 을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 에 이르렀다. 이한(里閑 -동리,마을) 을 돌아다니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이 그를 비범한 인물임 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그날 밤에 안길은 아내와 첩 세 사람을 불렀다. "오늘밤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오." 두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어찌 동침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또 한 아내는 그대로 시행을 하였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 집은 황룡사와 황성사의 두 절 가운데 있고 이름을 단오 - 속언에 이르길 단오를 차의라 한다.- 라고 하니, 주인이 서울에 오게 되면 찾아주기 바라오."
거득공은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각 주의 향리 한 사람을 서울 안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어 지키게 하는 상수리라는 제도가 있었다. 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지킬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다. 단오거사의 집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이 오랫동안 길가에 서 있으니 늙은이가 지나갔다.
그의 말을 한참 듣고 서서 말했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궐이고 단오란 거득공인데 외군(外郡)에 잠행을 하였을 때에 어떤 인연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지." 안길이 사실대로 말하자 노인이 말했다. "그대가 궁성의 서쪽 귀정문으로 가서 출입을 하는 궁녀를 기다려 사실을 말하시오." 안길이 그 말을 쫓아 아뢰었다. "무진주에 사는 안길이 상공을 뵈오러 왔습니다." 거득공이 그말을 듣고 쫓아 나와 손을 붙잡고 궁으로 들어가 공의 부인을 함께 불러내어 잔치를 열었다.
<삼국유사 문무왕법민조>
여기서 거득공의 집이 황룡사와 황성사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황룡사의 위치는 알려져 있으나 황성사가 어디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다. 다만 월성을 중심으로 황룡사의 반대편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인용사터가 현재로서는 상당히 유력하다고 보여진다.
▲월성
월성에는 월상루, 망은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이 있었다. 이 누각들은 월성의 성벽 봉우리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十年, 秋七月, 起<望恩樓>於宮西.
10년 가을 7월,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전>
○又*<創,刱>報恩寺, 又望德樓.
왕은 또 보은사와 망덕루를 세웠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
○十四年, 秋七月, 重修<鳴鶴樓>.
14년 가을 7월 명학루를 중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전>
○二年, 冬十月, 立鼓樓<月城>內.
2년 겨울 10월,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전>
▲월성
원성왕 때 세운 것으로 기록한 망은루와 망덕루가 같은 누각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루(鼓樓)는 고대 사회에서 병사들의 돌격을 격려하기 위해서 북을 설치하여 울리는 누각이다. 주로 도성 가운데 설치하며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높은 곳에 있어야 도성 전체에 잘 들렸을 것이다. 월상루는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48대 경문왕과 49대 헌강왕의 기록에 등장한다. 월상루 역시 높은 곳에 위치하여 도성 전체가 잘 내려다 보였던 것 같다.
○十一年, 秋八月, 重修<月上樓>.
11년 가을 8월에 월상루를 중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전>
○六年, 秋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 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 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 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6년 가을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전>
▲월성
월성의 정전(正殿)은 조원전이었다. 조원전에서는 신하들로부터 신년하례를 받기도 하였고, 외국사신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五年,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正賀. 賀正之禮, 始於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전>
○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전>
유가종의 조사인 고승 대현은 남산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중략... 경덕왕 때인 천보 12년 계사(753) 여름에 가뭄이 심했다. 이에 대현을 내전으로 들여 금광경을 강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하루는 재를 드리는대 바리때를 벌려놓고 정수 올리기를 가다렸지만, 공양하는 이가 정수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가 꾸짖으니 공양 하는 자가 말했다.
▲월성
"대궐 안의 우물은 말라버렸기 때문에 먼 곳까지 가서 또오느라고 늦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대현이 말했다. "왜 진작 이르지 않았는가?" 낮에 경을 강할 때 대현이 향로를 받들고 묵묵히 있었더니 잠시 후에 우물물이 솟아오르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절에 세우는 장대)과 높이가 같게 되었다. 이에 궁중에서 모두 놀라워 했으며 이 우물을 금광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략...
그 이듬해 갑오(754) 여름 왕은 또 고승 법해를 황룡사로 청해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나아가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하기를, "지난해 여름, 대현법사는 금광경을 강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구치게 하였는데, 스님의 법도는 어떠하오?"
"그것은 극히 작은 일이온데 무얼 그다지 칭찬하시옵니까? 이제 창해를 기울여 동악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시 후에 궁중에서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가 달려오더니 고하기를, "동쪽 연못이 넘쳐서 이미 내전 50여간이 떠내려 갔습니다." 왕이 놀라 망연자실하므로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를 기울이고자 먼저 수맥을 불린 것 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더니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서 불전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 때 물러갔습니다." 이 일로 하여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조>
▲월성해자
신라의 왕들은 어디에서 죽음을 맞았을까?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으나 몇몇 기록이 남아 전한다. 먼저 문무왕의 경우는 침전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왕위찬탈 과정에서 피살된 당한 44대 민애왕의 경우는 ''월유택에서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북궁에서 죽었으며,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경애왕은 성남이궁에서 죽었다.
○太子卽於柩前.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전(하)>
○時, 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민애왕전>
○十一年,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11년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전>
▲월성해자
고구려의 경우 빈전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다. 백제도 한성시대나 사비시대의 빈전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웅진시대에는 정지산에 빈전이 있었다. 물론 기록에 의한 것은 아니고 유적 발굴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신라의 경우는 유일하게 경애왕이 서당에 빈전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중국 북위시대에는 태극전 좌우에 동당과 서당이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도 이를 원용하여 궁궐 내에 서당이 있었던 것 같다.
○<敬順王>立.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전>
경순왕이 전왕인 경애왕의 빈전을 서당에 마련했다는 기록이다. 현재 서당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월성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월성해자
<2010.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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