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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명활성

蔥叟 2010. 7. 5. 06:08

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명활성

 

   경주분지의 동쪽에 성벽처럼 자리한 산이 명활산이다. 표고 245m의 낮은 산이나, 신라의 건국 이전부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육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의 촌장이며, 배씨의 시조인 지타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五曰, 金山加*<里,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岐部, 又作韓*<岐,歧>部裵氏祖.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조>

   

▲명활성

  

   동해에서 오는 왜병에 대비하는 중요한 위치인 까닭에 일찍부터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왜병과 자주 격전을 벌인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남아있다. 또 명활전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이는 명활성을 관장하는 관청이었으니 명활산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明活典, <景暉王{神德王}>二年置. 大舍一人, 看翁一人. 

명활전: 경휘왕 2년에 설치하였다. 대사 1명, 간옹 1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8 직관조>

 

   한편 왕경이 도시구조로 재정비될 때는 명활성이 궁성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王移居<明活城>.

18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왕전>

 

○十年, 春正月, 王移居<月城>.

10년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전>

 

  즉, 자비왕 18년인 475년 부터 소지왕 10년인 488년까지 14년동안 신라의 왕성은 명활성이었다. 이에 대해 학계는 고구려 장수왕의 북수남진정책에 따른 국내외적 상황의 불리로 인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멀리 있는 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위협보다는 동해안으로 침입한 왜병과 전투가 잦았기 때문에 명활성으로 왕궁을 옮긴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것은 명활성이 동해로부터 침입하는 왜병과 처음으로 충돌하는 최전방에 위치하는 전투기지의 성격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의 침입을 6차례나 당하고 있는 소지마립간대에 월성으로 환궁하고 있는 점도 명활성으로의 이궁이 고구려의 남진책에 원인이 있지 않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469년 경주에 중국식 행정구역 제도인 리방제(里方制)를 채택하였으며, 명활성으로 이거한지 13년째 되는 해인 487년에는 경주와 지방과의 연락 및 교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통제도가 제정되었다. 그 3년 뒤에는 지방의 물자를 판매하는 공영시장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定京都坊里名.

12년 봄 정월, 서울의 방과 리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전>

 

○九年, 春三月,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 

9년 봄 3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十二年, 春三月, 初開京師市{肆}, 以通四方之貨.

 

12년 봄 3월,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전>

 

   즉, 이러한 국내의 전후 상황은 명활성으로 왕궁을 이동한 것이 외부요인에 의한 것보다는 왕경의 정비과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월성으로의 환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지왕 22년 이후부터는 금성에 대한 내용이 사라지고 있어 명활성으로 이궁한 주된 요인이 월성의 수즙을 비롯한 왕경의 정비와 관련있다고 여겨진다.

 

▲명활성

 

   명활성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전 중의 하나는 비담의 난이 이곳을 근거지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十四年, 冬十一月,  拜伊毗曇爲上大等.

14년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전>

  

   비담은 선덕여왕이 자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한지 13개월만에 반란을 일으켰다. 여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는 구실이다. 비담과 염종의 난에 대하여 삼국사기의 열전 김유신전과 신라본기 진덕왕전에 좀더 자세하게 실려있다.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衄}之兆也.” 士卒呼吼聲振(+天)地. 

16년 정미는 선덕왕 말년이며, 진덕왕 원년이었다.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하여 폐위시키려 하였다. 왕은 궁안에서 이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抱大{火}, 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呪}曰: “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果{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 <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 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連坐者三十人}.

 

대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하였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 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 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 돌격하였다. 비담 등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상)>

 

○元年, 正月十七日, 誅<毗曇>, 坐死者三十人.

원년 봄 정월 17일, 비담을 목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전>

 

▲명활성

 

  이외에도 명활성과 관련된 기록은 많이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四年(405)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년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니사금전>

 

○十五年(431) 夏四月 倭兵來侵東邊 圍明活城 無功而退.

15년 여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전>

 

○五年(462) 夏五月 倭人襲破明活開城 虜人一天而去.

5년 여름 5월, 왜인이 명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十六年(473) 秋七月 葺明活城.

가을 7월, 명활성을 보수하였다.

 

○十八年(475) 春正月 王移居明活城.

18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전>

 

○十年(488) 春正月 王移居月城.

10년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전>

 

○十五年(544) 秋七月 修築居明活城.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전>

 

○十五年(593) 秋七月 改築居明活城 周三千步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개축하여 그곳에 거주하였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전>

 

○一年, 六祭五廟, ...중략...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 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 祭<中農>; 立秋後亥日, <園>祭<後農>; 立春後丑日, <犬首谷>門, 祭<風伯>; 立夏後申日, <卓渚>祭<雨師>;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

 

1년에 여섯 번씩 5묘에 제사를 지냈다. ...중략...입춘 후 해(亥)일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에 제사 지내고, 입하 후 해(亥)일에 신성 북문에서 중농에 제사 지내고, 입추 후 해(亥)일에 산원에서 후농에 제사 지내고, 입춘 후 축(丑)일에 견수곡 어구에서 풍백(風佰)에게 제사 지내고, 입하 후 신(申)일에 탁저에서 우사(雨師)에게 제사 지내고, 입추 후 진(辰)일에 본피유촌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

 

○明活典, <景暉王{神德王}>二年置. 大舍一人, 看翁一人.

명활전: 경휘왕 2년에 설치하였다. 대사 1명, 간옹 1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잡지  직관조>

 

己未年(자비마립간 22년, 479)倭國兵來侵始築活城入避. 圍梁州二城克而還. 

기미년 왜국의 군사가 와서 침범하였다. 비로소 명활성을 쌓고 들어가 피하니, 왜병이 양주의 두 성을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왕력>

 

享年八十四入寂, 葬明活城西.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명활성 서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의해제5 원광서학조>

 

明活城在月城東 新羅慈悲王移居 于此石築 周七千八百十尺.  

명활성은 월성 동쪽에 있다. 신라 자비왕이 옮겨 살았다. 이때에 돌로 쌓았다. 주위는 7818척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

 

 

明活城在月城東 眞興王十五年甲戌(554)築. 眞平王十五年癸丑(595) 改築周三千步 輿地勝覽 周七千八百十尺步 慈悲王十六年改築(473) 葺之十八年乙卯(475) 移居于此. 

명활성은 월성 동쪽에 있다. 진흥왕 15년 갑술년에 쌓았다. 진평왕 15년 계축년에 개축하였는데 주위가 3천보이다. 여지승람에는 주위가 7818보이고, 자비왕 16년에 개축하였고, 18년 을묘년에 수리하여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동경잡기 권1 성곽조>

 

明活城在月城東 新羅慈悲王移居 于此石築 周七千八百十尺.

명활성은 동성 동족에 있고 신라 자비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석축으로 쌓았는데 주위는 7810보이다.

 

<여지도서(하) 경주 고적조>

 

明活城在月城東 新羅慈悲王移居 于此石築 周七千八百十尺.

명활성은 월성 동쪽에 있고 신라 자비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석축으로 쌓았는데 주위는 7810보이다.

 

<경주부읍지 고적조>

 

 

○壬寅年 夏五月 倭寇鷄林 破明活城 虜人一千而歸.

임오년 여름 5월 왜구가 계림의 명활성을 차괴하였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았다.

 

<동사강목 권제1>

 

 

明活城(在月城東) 新羅慈悲王十六年葺築 十八年移居. 眞興王十五年改石築 眞平王十五年改築.

명활성(월성 동쪽에 있다)은 신라 자비왕 16년에 수리하여 16년에 이거하였다. 진흥왕 15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진평왕 15년에 개축하였다.

 

<대동지지 방여총지 권2 신라국도>

 

○東京之城 自金城始其後 又築月城滿月城明活城南山城 皆帝居也.

동경의 성들은 금성을 시작으로 월성, 만월성 명활성, 남산성이 축조되었다. 모두 황제가 거주하였다.

 

<동경통지 권6 성지>

 

明活城宮室 慈悲乙卯移居月城 又矣慈悲葺之後二年定居焉 眞平癸丑改築 城周三千步 在月城東石築.

명활성 궁실은 자비왕 을묘에 월성으로 이거하였다. 또 자비왕이 고쳐 샇은 이후 2년동안 거처하였다. 진평왕 계축년에 개축하였고, 성 주위는 3천보이다. 월성동쪽에 석축으로 쌓았다.

 

<동경통지 권7 宮室附亨>

 

▲명활성

  

   한편 1988년 홍수로 인하여 명활성 북벽의 일부가 붕괴되었는데, 이곳에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비문에 등장하는 신미년은 진흥왕 12년(551)으로 추정되는데, 문헌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명활성은 실성니사금 4년(405)으로 역시 많은 차이가 보인다. 명활성은 대체로 405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551년의 작성기록은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거나 아니면 수축이 있었는데 문헌기록에 누락된 경우로 보인다.

 

<판독문>

 

辛未年土 月中作城也上人邏頭本波部

伊皮尒利吉之郡中上人烏大谷鳩智支下干支

匠人比智休波日幷工人抽兮下干支徒作受長四步

五尺一村 文叱兮一伐徒作受長四步五尺一村▲▲

利波日徒受長四步五尺一村 合高十步長十

四步三尺三村 此記者古他門中西南回

行其作石立記 衆人至十一月十五日

作始十二月卄日了 積川五日 也

書寫人 源欣里阿尺

 

 

 

<해석문>

 

신미년(辛未年) 11월에 성을 만들었다.

상인 나두(上人邏頭)는 본피부(本波部)의 이피이리(伊皮尒利) 길지(吉之)이고, 군중 상인(郡中上人)은 오대곡(烏大谷)의 구지지(鳩智支) 하간지(下干支)이다.

장인(匠人)인 비휴지(比智休) 파일(波日)과 □인(□人)인 추해(抽兮) 하간지(下干支)가 거느린 무리(徒)는 길이 4보(步) 5척(尺) 1촌(村), 문질혜(文叱兮) 일벌(一伐)이 거느린 무리는 길이 4보5척1촌, □□리(□□利) 파일(波日)이 거느린 무리는 길이 4보5척1촌을 할당받았다. 합하면 높이는 □보이고 길이는 14보3척3촌이다.

이 기록은 고타문(古他門)에서 서남쪽으로 돌아가서 돌로 만들어 세워 적었다.

많은 사람(衆人)이 와서 11워15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12월 20일에 끝마치니 합하여 35일이 된다.

글을 쓰고 베낀 사람(書寫人)은 원흔리(源欣里) 아척(阿尺)이다. 

 

 

 

<2010.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