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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남궁ㆍ북궁

蔥叟 2010. 7. 8. 07:18

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남궁북궁

    

   신라시대 왕경 구조와 관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문헌기록에는 왕이 상주하는 왕궁인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다음 보위를 잇게 될 태자가 거주하는 동궁(東宮·지금의 안압지 일대), 퇴임한 여왕이나 왕의 어머니 등을 위한 북궁(北宮·정확한 위치 불명)이 등장하지만, 남궁(南宮)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남궁터로 추정되는 경주박물관입구 언덕

  

   그런데 북궁과 대비되는 남궁이 월성에 있었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 예정지에서 확인된 깊이 10.27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처음으로 '南宮之印'이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가 발견되었다. 월성 남쪽 어딘가에 조성된 별궁(別宮)의 일부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정확한 위치나 기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신라시대 남궁은 그 실체가 여전히 아리송하다. 이와 관련하여 월성의 동남쪽 끝자락의 남쪽, 즉 경주박물관 정문 남쪽의 언덕이 월성의 일부로 보고 이곳이 남궁의 일부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2007년에 경주의 북쪽인 동천동 통일신라시대 왕경 도로 유적에서도 ‘南宮之印’이라는 문자 도장을 찍은 수키와 조각 1점이 출토되었다. 두 인장 기와 모두 정방형 테를 두른 안쪽에 ‘남궁’(南宮)과 ‘지인’(之印)이라는 두 글자씩을 각각 한 행씩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순서로 새겼다.  

 

▲추정남궁터

   

   하지만 두 인장 기와는 서체가 다른 데다, 재료로 이용된 기와 또한 종류와 제작시기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 '남궁지인' 기와가 8세기 무렵 제작품으로 추정된다면, 동천동 인장 기와는 신라 멸망 직전인 9세기 초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부지에서 ‘남궁지인’도장이 출토되었을 때만 해도, 이 일대가 남궁이 있던 곳으로 지목되기는 했으나, 월성 북쪽에 위치한 동촌동 유적에서도 같은 인장 기와가 확인됨으로써 정확한 위치는 좀 더 많은 고고학적 출토 유물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남궁과는 반대로 북궁은 기록상에는 등장하지만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궁은 서라벌에 있었던 궁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얼마 되지 않는 북궁 관계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사서에 전하지만 위치나 규모 등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추정남궁터

 

至二年丁未, ...중략... 是年七月, <不,北>宮庭中, 先有二星墜地, 又一星墜, 三星皆沒入地. 先*時{是}宮北厠圊中二莖生, 又奉聖寺田中生蓮.

2년 정미에 이르러 ...중략...이해 7월에는 북궁의 뜰 가운데 별 두개가 떨어지고 또 한 개가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먼저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蓮)이 나고 봉성사의 밭 가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삼국유사 혜공왕조>

 

을사년(乙巳年, 885년) 이전에는 수풀이 무성하다고 해서 '북궁 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불렀다.

 

<매개집(梅溪集) 권 4 '서해인사전권후'(書海印寺田券後)

 

   매개집은 조선 초기 인물인 매개(梅溪) 조위(曺偉.1454-1503)가 남긴 문집이며, 매계집(梅溪集) 권4에는 '서해인사전권후'(書海印寺田券後)라는 글이 수록돼 있다. 이 글은 해인사가 창건된 신라말기 이후 조선 전기까지 해인사가 기증받거나 매입한 토지의 내력을 기록한 문건이다. 조위는 이 문건이 '경술년(庚戌年), 즉, 서기 1490년(조선 성종 21)에 학조화상(學祖和尙)이란 승려가 해인사 비로전(毗盧殿)을 중창하다가 건축 전문가의 한 종류인 도료장(都料匠) 박중석(朴仲石)이라는 사람이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양미(樑楣. 도리 혹은 처마)에서 발견한 것' 이라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을사년(乙巳年) 이전에는 수풀이  무성하다고 해서 '북궁 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만 부르다가 경술년 이후에야 비로소 '혜성대왕 원당'(惠成大王願堂)이라 일컬어지기 시작했다."한다. 

  

▲'南宮之印' 명문기와편

 

○十一年,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전>

 

   그런데 북궁과 관련된 이 기록들이 은, 혜공왕 때 "북궁 뜰에 별이 떨어졌다"든가, "진성여왕이 북궁에서 죽었다"든가, 진성여왕이 왕이 되기 전의 호칭이 '북궁 장공주(長公主)'였다든가 해서 모두 경문왕가와 관련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북궁이라는 말은 경문왕가의 거주지, 나아가 경문왕가를 가리킨다. 

 

 

 

<2010.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