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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농다리(籠橋)

蔥叟 2010. 1. 22. 07:34

진천 농다리(籠橋)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다리로, 당초에는 28칸의 교각이었으나 현재는 25칸만 남아 있다.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이며, 교각 사이의 내폭은 80cm 내외이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 두툼하고 튼실한 교각을 여러 개 만들고, 교각 사이에 넓적한 돌을 하나씩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석회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며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규모도 크고 축조술도 특이하며 교량학적으로도 우수함이 이미 인정되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범상치 않은 돌다리이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강을 건너는 꼴이다.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농다리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1932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 진천의 옛 지명이 상산이었다고 함)에 농다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상산지에 의하면 진천고려 고종때의 권신 임연장군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상산지의 간행연도가 1932년인지라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籠橋在郡南一里洗錦川加里川合流之屈峙前橋也距今九百餘年前卽麗朝初葉時代屈峙林氏先祖傳稱林將軍創.

농교(농다리)는 상산군의 남쪽 1리에 있는데 세금천(미호천의 옛 이름)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굴치산 앞에 있는 다리이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 고려조 초엽에 굴치임씨의 선조인 전칭 임장군이라는 사람이 창설하였다. 

 

<常山誌>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장마물이 넘칠 때면 다리 위로 흘러 몇 길에 이르고 노한 파도와 놀란 물결이 그 사이에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일찍이 하나의 돌도 달아나지 않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네 칸이 매몰되어 지금은 25칸이다. 그 설치된 것을 돌아본 즉, 흩어져 있는 돌을 포개어 쌓은 것에 불과한데도 험한 여울에 가로질러 있으면서 능히 천년의 오랜 시간을 지탱하였으니 세상에서 신기하다고 일컫는 것이 당연하다.

 

   林장군이라 통칭되는 진천출신 林曦 將軍(진천지역 호족)이 고려의 태조 즉위 직후 (918년) 6일 만에 단행되었던 인사발령에서 兵部令(현 국방부 장관)으로 보임된 것으로 볼 때 1100년 가까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농다리 건설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한다.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임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세금천 건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 하자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으니 여인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입니다"하니 장군은 여인의 효성이 지극함과 그 정경이 딱하여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하루 아침에 다리를 놓아 부인이 무사히 건너도록 하였다 한다. 그 때 용마는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하며 용마의 바끈이 끊어져 떨어진 돌을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용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수하고 정감 있게 생긴 농다리에 얽힌 전설이라기엔 좀 살벌하다.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옛날 굴티마을 임씨네 집안에 아들과 딸 남매가 있었는데 둘 다 훌륭한 장사라서 서로 죽고 사는 내기를 했다. 아들은 굽 높은 나무신을 신고 목매기 송아지를 끌고 서울까지 갔다 오기로 하고, 딸은 농다리를 놓기로 하여 목숨을 건 내기를 했다. 아들은 송아지를 끌고 서울로 떠났고 딸은 돌을 날라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만히 보니 아들은 올 기미가 없고 딸은 거의 마무리가 다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궁리를 한 끝에 꾀를 내어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게 해 공사를 지연시켰다. 그때 아들이 돌아왔고 다리를 완성하지 못한 딸은 약속대로 죽었다. 그 딸은 농다리의 상판돌 하나를 얹지 못하고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신 상판돌을 얹어 다리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후 딸이 놓은 돌들은 아무리 물살이 거세도 끄떡도 없는데 마을 사람들이 놓은 상판돌은 장마만 지면 떠내려 갔다.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이 전설은 당시 여인네들의 고난한 삶을 전하는 이야기다. 남자 형제와 목숨을 건 내기를 해야 했던 무모한 딸이 있고, 딸을 죽이더라도 아들을 살려야 하는 모진 어미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누이의 목숨과 어미의 피눈물을 담보로 세상을 살아가는 아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설이 암시하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농다리를 만든 사람이, 집안에서조차 소외되어 죽어야 했던 누이라는 내용이다. 전설이야 전설일 뿐이지만 농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농다리의 이 모질고 슬픈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다리는 소외된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다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하소연할 길 없는 슬픔을, 자신들의 손으로 쌓고 자신들의 손으로 지켜온 이 농다리에 묻기도 하고 또 미호천으로 흘려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또다른 전설은 나라안에 변고가 일어날 때는 농다리가 몇일을 두고 운다고 하는데 한일합방 당시와 6.25동란 당시에도 이 다리가 몇일동안 울었기 때문에 부락민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농다리(籠橋)

  

▲농다리(籠橋)

 

 

 

<2009.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