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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蔥叟 2010. 1. 21. 04:57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둘레가 4km나 되는 거대한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上黨縣)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외에도 '상당 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장군이 쌓았다는 기록,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 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뒤)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 7,773척인데 성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석성으로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되었으며, 그후 계속 수축된 것이 성문 무사석(武士石)의 명문에 밝혀져 있다. 숙종 때 축성기록에 '인상당기지 개석축'(因上黨基址改石築)이라는 기사가 있는 점과 청주가 백제시대 상당현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 성은 남문과 동·서문을 비롯하여 동북과 서남에 암문(暗門)이 있으며, 치성(雉城) 3개가 있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현재 한옥마을 자리는 옛지도에는 초옥(草屋)의 민가가 있던 곳이며, 저수지는 본디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만든 것이다. 남문 밖에서 '사량부(沙梁部)'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나오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서 국방의 요충이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해 성내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동서 산맥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해 꺾여서 합쳐지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고, 그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쌓아 다지는 내탁(內托) 공법을 사용했다.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3~4m이다. 4벽 중에서 서벽이 가장 높고, 장대(將臺)·포루(砲樓)가 배치된 점으로 보아 이 성의 방어 요지가 서쪽임을 알 수 있다.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한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2개의 암문(暗門), 동장대와 서장대, 15개의 포루, 1개의 수구 등이 있었다. 1977~80년에 남·서·동문의 문루를 복원했다. 이 성을 신라 김유신의 전적지인 낭비성(娘臂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상당산성도는 전남 구례군의 운조루에 보관되어 있는데, 충청병사 이태상이 영조 40년(1764)에 상당산성을 그려 올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상당산성도는 산성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산성 안쪽의 건물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상당산성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남문 성벽

 

▲성벽

   

▲ 성벽

   

▲여장

   

▲남문 성벽

   

▲남문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치성

 

▲암문

 

▲암문 치성

  

▲암문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서문(미호문)

   

▲서문

 

▲서문

  

▲명문

 

▲서문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성벽 

 

▲성벽 

 

▲동문과 성벽

 

▲동문(진동문) 

 

▲동문 

 

▲성벽 

 

▲상당산성도

 

 

 

<2009.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