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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蔥叟 2009. 6. 7. 06:16

경주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정혜사(淨惠寺)는 신라 말에 창건되어 19세기까지 법등이 전해진 절이었다. 회재는 독락당에 거주하면서 정혜사의 승려와 친교가 있었고 정혜사의 정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독락당을 증축하기 이전, 은둔생활의 초기 2년 동안 정혜사를 휴식과 독서처로 삼았고, 회재 사후에도 정혜사 승방 안에는 그의 글씨와 서책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조선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인 승려와 최고의 유학자가 신분을 뛰어 넘어 교류하고 토론하던 아름다운 관계였다. 회재는 계정을 수리하면서 2칸 방을 덧달아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정혜사 승려가 언제든지 와서  거처할 수 있도록 배려할 정도였다. 그 승려의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은거시절 회재의 유일한 친구였고, 불교적 세계관을 인식시켜준 스승이었을 것이다. 

 

▲십삼층석탑

  

▲십삼층석탑

  

   현재 정혜사터에는 높이 5.9m의 희귀한 석탑이 있다.이 탑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탑이다. 불국사의 다보탑,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이형석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는 정도 외에는 어떤 유사한 형태의 탑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탑이라는 설이 있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각층의 층급받침이 3개인 점 때문에 8세기 탑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다. 대체로 7~8세기에는 5개, 9세기에는 4개 10세기에는 3개의 층급받침이 조각되었기 때문이다. 기단부는 흙으로 쌓은 토층기단(土層基壇)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전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요소이다.  

 

▲십삼층석탑

  

▲십삼층석탑

   

이 탑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는 그의 문집인 『하서집』(河西集)에 실린 시에서 “정혜사는 신라의 옛절 / 탑은 12층”이라고 하였으며, 1669년도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회재 이언적이 정혜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1933년도에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는 “37대 선덕왕 1년(780)에 당나라의 첨의사(僉議使) 백우경(白宇經)이 참소를 입고 이곳으로 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왕이 행차하여 정혜사라 이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인용한 문헌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아 동경통지의 기록은 믿기가 어렵다.

  

▲십삼층석탑

 

▲십삼층석탑

 

이 탑은 조선 영조 때에 해체 복원한 적이 있으며 1920년과 1976년도에도 수리한 바 있으며 최근에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이 시도되다 주민의 신고로 불발에 그쳤으나 1층 탑신부가 다소 벌어져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건축가인 목수 신영훈 선생은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 대하여 이색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십삼층석탑

 

▲2~13층 탑신부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1층은 넓고 든든한 구조이나 그 위로 조성된 상층부는 갑자기 작아졌다. 여느 석탑에 비하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이상한 형체이다. 그러나 이 탑이 중국의 승덕사 13층탑과 같은 유형을 추상하여 석탑으로 조성한 예를 남긴 것이라 하면 1층 목조 툇간으로 인해 1층이 상층부에 비하여 그렇게 독특한 모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건축물은 기능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에 기능이 폐기되면 그 건물은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탑의 1층 둘레에 툇간을 둔 것으로 가정하면 분황사 탑이나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의 기단부가 탑신부에 비하여 지나치게 큰 이유도 말끔히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13층 탑신부

 

▲1층 탑신부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하나밖에 없는 이형석탑이다. 기단은 낮은 단층 토축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최근에 흙을 덮어 없애버렸다. 그 위에 1층 탑신을 받기 위한 괴임 2단이 4석으로 구성되었다. 1층탑신만이 매우 큰데, 네 귀퉁이에 큰 방형 석주로 우주를 세우고, 그 안에 양 측면으로 우주에 붙여 작은 기둥을 세우고서 그 위에 인방, 아래에 하방을 걸쳤는데 그 사이의공간은 밀폐되어 있다. 이러한 처리는 4면이 모두 같은데, 목탑의 감실형을 따른 것 같다.  

 

▲1층 감실

 

▲1층 감실

 

   지붕돌 받침은 3단이고 우동이 모각되어 있다. 1층 지붕 위에는 1단의 괴임돌로 상층 탑신을 받고 있는데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서 옥개 위에 마치 상륜부처럼 각층 탑신이 중첩되고 있다.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1석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받침이 각층 3단임은 1층과 같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있다. 이탑은 층수가 13층이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이 급격히 체감되며, 1층 각면에 감실의 개설 등 특수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목탑이긴 하지만 일본의 단잔진자탑과 서로 닮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근년에 탑을 보수하면서 기단부가 땅에 파묻혀 버렸다. 이 탑의 기단부는 자연석을 쌓아 흙으로 덮은 형태인데, 2007년 보수 정비를 하면서 매몰됐다. 문화재청은 당시 기단부 돌이 벌어지고 지반이 약해 붕괴를 막기 위해 매몰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반을 보강하면 될 것을 안 하고 기단부를 매몰한 것은 원형 파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조속한 원형 복원을 기대한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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