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후직묘(傳金后稷墓)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의 충신인 김후직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일명 간묘(諫墓)라고도 부른다. 무덤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이며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봉분은 지름 25m, 높이 6m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이며, 묘의 앞 부분에는 후대에 만든 상석이 있고 그 좌측에 묘비(墓碑)가 있다. 묘비는 조선 숙종 36년(1710) 경주부윤 남지훈이 김후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김후직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전한다.
▲전김후직묘
▲전김후직묘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이다. 그는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었다가 병부령으로 전직하였다. 대왕이 사냥을 몹시 좋아하자 후직이 간하였다. “옛날 임금들은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반드시 심사원려하여, 좌우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바른 말을 받아 들였으며, 부지런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감히 안일하고 편안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뒤에야 덕정이 순미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광부와 포수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하여 산과 들로 뛰어 다니기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으며, 『서경』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을 일삼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저질러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사냥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러나 왕이 말을 듣지 않아 다시 간절하게 충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후직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자기의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하로서 임금의 단점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은 놀고 즐기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아 패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꼭 임금을 깨우쳐 주려 하니, 나의 시체를 대왕이 사냥다니는 길 옆에 묻어라.” 세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전김후직묘
▲상석
후일 왕이 사냥을 가다가 도중에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다. 종자가 말하기를 “저것은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전해 주었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충성으로 간언하고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에 대한 사랑이 깊도다.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왕은 마침내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 김후직전(金厚稷傳)>
진평왕에게 정무에만 힘쓸 것을 간곡히 간(諫)한 김후직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이 묘소를 기리어 간묘(諫墓)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간묘가 김후직의 묘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 실정이며 다만 서라벌의 북쪽에는 호원사로 이름난 논호림(지금 고성숲)과 유림숲이 울창하여 새들과 짐승들이 많이 서식했으므로 임금과 귀족들은 이 숲에서 사냥을 즐기는 일이 많았을 것이라 여겨 진평왕이 이곳으로 사냥을 왔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하여 김후직묘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묘비
▲묘비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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