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서동리 삼층석탑 출토 토제소탑
<국립경주박물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의 춘양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통일신라 9세기의 삼층석탑에서 1962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동탑의 1층 탑신부 윗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곱돌제 사리항아리와 함께 발견된 99기의 흙으로 만든 작은 탑(土製小塔)이다. 흙탑은 틀로 찍어낸 뒤 호분을 발랐는데, 바닥에는 원추형의 구멍을 뚫고 여기에 다라니(陀羅尼)를 넣고 둥근 나무마개로 막았으나 대부분 부식되어 없어졌다.
▲토제소탑
이처럼 사리구와 함께 탑 속에 작은 탑을 함께 봉안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리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99개 혹은 77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그 하나에 다시 다리니를 넣어 탑에 봉안하는 행위는 곧 99억개의 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행위가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탑을 흔히 '무구정탑(無垢淨塔)'이라고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드물고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특히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무구정광대다리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번뇌의 대가 없는 깨끗하고 빛나는 큰 주문에 대한 경'이라는 듯이다. 석가모니가 가비라성의 정사(精舍)에 있을 때 불교를 믿지않는 어떤 사람이 1주일 후면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찾아오자, 석가모니는 이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갈 것이며 그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귀의하오니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석가모니는 "낡은 탑을 수리하고 따로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주문을 써넣고 섬기면 생명이 연장되고 죽어서 극락왕생하여 백천 겁 복락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다름 세상에는 모든 죄업이 소멸되어 지옥의 고통이 없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고 이때 제개장보살(除蓋障菩薩)이 다른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복덕을 주실 것을 간청함으로서 석가모니가 이 경을 정식으로 설하게 되었다.
이 경전은 704년 인도 출신의 스님 미타산(彌陀山)에 의하여 중국에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년 뒤인 706년 황복사 탑에 최초로 봉안되었다. 무구정경의 구체적인 법식은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를 외우고 그것을 99벌 혹은 77벌을 써서 진흙으로 만든 토탑에 넣어 탑에 봉안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77억 또는 99억개의 탑을 다른 곳에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77이나 99의 숫자는 홀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숫자로 궁극적으로는 무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같은 믿음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8만4천탑의 건립한 것이나 중국 수나라 문제의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 건립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기원전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 신심 깊은 아소카 왕은 넓은 지역에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하여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다. 아소카왕은석가모니의 유골을 그의 위대한 생애와 진리를 탑이라는 구조물로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불교의 통치 이념을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였다. 이후 스투파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성스러운 구조물로 변모하여 신자와 승려들의 경외와 참배의 대상이 되었다. 불탑을 쌓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으로, 그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석가모니에게 귀의한다는 뜻으로 자리잡았다. 서기전 3세기 아소카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산치탑이라 하여 거대한 불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불사리 신앙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수문제(隋文帝)의 인수년간(仁壽年間, 601~604)이다. 수문제는 즉위년인 개황 원년(581)에 불교 부활의 칙명을 내렸다. 그리고 인수 원년(601), 인수 2년(602), 인수 4년(604) 3회에 걸쳐 전국의 명소와 사원에 111기의 사리탑, 즉 인수사리탑을 축조하였다. 인수사리탑들은 통일 후 불력으로서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체적 역할로 건립되었다. 그것은 수문제가 인도의 아육왕 8만 4천탑 조립의 고사를 따라 천하통일의 상징으로, 동년 동일 동시에 동일 설계로 전국 100여 주에 일제히 5층 목탑을 건립하니, 세간에서 ‘인수사리탑’으로 부른다. 그는 정신적, 정치적 통일을 도모하여 아육왕 8만 4천탑을 모델로 하였을 것이고 ‘中國의 아소카왕’으로 자처한 것 같다.
<200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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