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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사천왕사터 출토 녹유전(綠釉塼)

蔥叟 2009. 1. 13. 05:02

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사천왕사터 출토 녹유전(綠釉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터는 통일신라 초기인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된 쌍탑식(雙塔式) 가람으로, 2기의 목탑(木塔)이 배치되어 통일신라 사찰가람의 전형을 처음으로 이룬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섬세한 조각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으로 그동안 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사천왕사터 출토 녹유전(綠釉塼.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은  발굴조사 결과 탑의 탑 기단부를 장식하였던 면석으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녹유전은 모두 3가지 형식으로, 탑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매씩 조합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인물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 표정과 자세, 화려하고 정교한 갑옷 표현 등은 통일신라 초기 불교조각을 대표할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이 녹유전(綠釉塼)에 대해 최첨단 3D Scan 장비를 이용한 정밀 실측조사를 실시한 결과 녹유전은 A상과 C상 (강우방 교수의 분류에 의함)의 것으로 서목탑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녹유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무렵 사천왕사지 에서 수습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편들과 함께 3차원 영상촬영을 시도하여 도상으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된 사천왕사지 녹유전의 모습은 모두 3종류의 도상으로 복원되는데, 대부분이 부분적인 파편형태로만 남아 있어 도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나, 이번 작업을 통하여 녹유전의 크기(높이 90cm, 너비 70cm, 두께 7~9cm)와 A상과 C상에 표현된 섬세한 문양까지 모두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3D Scan으로 복원한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은 주상(主像)이 둥근 천정을 이룬 감실(龕室)에 무릎을 꿇은 좌우 악귀(惡鬼)를 올라타고 왼손에는 긴 칼을 들고 우측면을 비스듬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사자머리 장식을 한 흉갑(胸甲)과 작은 소찰로 장식된 요갑(腰甲)을 착용하고 있는 형상이다. B상은 정면을 응시하고, 왼손에 활, 오른손에 화살을 들고 있다. C상은 그 동안 허리아래의 모습만이 부분적으로 파악된 상태이고, 얼굴 모습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번 정밀 실측작업을 통하여 얼굴형태와 전체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C상의 주상 얼굴모습은 둥근 감실 속에서 작은 비늘모양의 소찰(小札)로 구성된 엉성한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고, 크게 부릅뜬 두 눈과 넓게 퍼진 큰 코를 가진 화난 얼굴로 좌측면을 노려보는 아주 험상궂은 인상의 상이다. 또한, 오른손을 들어 술이 길게 달린 칼을 쥐고 천의를 휘 날린 채, 두 마리의 악귀에 걸터앉아 왼손은 오른발에 걸린 왼다리의 무릎에 대고 있는 반가부좌(半跏趺坐)하고 있는 신장상의 모습이다.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녹유전 A상

 

   그러면 사천왕사(四天王寺) 동ㆍ서 목탑터 기단부에서 출토된 녹유전에 새긴 상(像)의 정체에 대하여 지금가지 강우방선생의 사천왕상설(四天王像說)과 문명대교수의 팔부신중설(八部神衆說)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발굴조사 결과 종래에는 알 수 없던 녹유전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녹유전은 동서 목탑터 모두에서 같은 양상으로 출토됐다. 즉, 녹유전은 기단부 네 면에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면석(面石)으로 사용됐으며, 아울러 그것들은 기단 계단을 중심으로 각 면에 6개씩(3쌍×2조), 모두 24개(4면×6개)를 배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녹유전 B상

 

▲녹유전 B상

 

 

 

   아울러 비록 그 전부가 파편 형태라고 해도, 일제시대 때 출토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인 파편과 최근 조사에서 확보한 조각들을 토대로 복원한 결과 이 녹유전들이 구현하고자 한 상은 3종류 정도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 같은 결과들은 사천왕상이라는 주장에는 타격이었다. 불교에서 사방 세계를 수호한다는 사천왕은 네 가지로 나타나야 하지만, 세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탑 하나를 장식한 총 숫자가 무려 24개나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팔부신중이라는 주장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된 것도 아니다.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미술사학자 임영애 교수는 이 녹유전 상은 사천왕도 아니며, 그렇다고 팔부신중도 아닌 신왕(神王)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이것이 사천왕이라면 북방을 관장하는 사천왕은 반드시 손에 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례가 발견되지 않으며, 나아가 활이나 화살을 든 모습을 사천왕상으로 보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이런 사천왕상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이후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또 팔부신중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그 점수가 8개가 아니라 24점에 달한다는 문제가 있다면서 각종 불교경전을 보아도 팔부신중은 8명이라 했지, 그 외 숫자를 거론한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3D Scan으로 복원한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따라서 사천왕사 창건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불교미술품들을 비교 사례하여 보면 이 녹유전 상은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불설관정경과 같은 불교 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미술사학자들도 이 녹유전 상이 대체로 사천왕상이나 팔부신중 어느 한 쪽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녹유전 C상 

 

 

▲녹유전 C상

 

▲사천왕사터 가람배치도

 

 

 

                                                                             <2008.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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