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감은사터 삼층석탑

蔥叟 2009. 1. 12. 06:04

경주 감은사터 삼층석탑

 

   신라의 삼국통일은 국토와 국민의 통합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도 융합을 가져왔다. 감은사는 신라의 국방상 요지인 동해구에 문무왕이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건립하다가 승하함에 따라 그의 아들 신문왕이 2년(682)에 완공한 사찰이다. 이 절터에는 동서에 두 탑이 서 있는데 두 탑의 규모가 거의 같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탑의 양식도 백제의 목탑계와 신라의 전탑계가 융합되어 하나로 집약, 정돈됨으로써 독창적인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니 이곳에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정립하게 된다. 실로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은 양식의 석탑은 다른 불교권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 변천해 왔고, 우리 불교의 성쇠와 함께 그 믿음을 구현해 오기도 했던 증거로서 독특한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통일의 새시대를 맞이하여 건립된 최초의 석탑이 바로 감은사터 삼층석탑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이나 정림사탑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은 감은사탑에서 시작되었다.  

 

▲감은사터 동서삼층석탑

 

▲감은사터 동서삼층석탑

 

   먼저 지대석과 기단부의 주변에 인도 스투파의 배티카에 해당하는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있다. 탑구를 다라 자연스럽게 탑을 돌면 바로 우요삼잡 의식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감은사탑과 기존석탑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단부에 있다. 바로 기단이 2층의 건축기단이라는 점이다. 2중기단이라는 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2중기단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석탑이 매우 안정감을 지니게 되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의 면석이 같은 돌로 되었고, 상하면석에는 상하 각기 2주와 3주의 탱주가 있어서 각면을 구분하고 있다. 이와같이 기단부에 우주와 탱주를 마련하였고, 또 많은 석재를 사용한 것 등은 바로 목탑의 수법이다.

 

▲서삼층석탑

 

▲동삼층석탑

 

   탑신부도 초층옥신은 4우주석과 4매의 면석을 따로 만들어서 맞춰 모두 8매의 돌로 결구하고, 2층 옥신석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매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돌이 별석으로 각기 4매씩으로 구성되었으며, 옥개받침은 각층이 5단이다. 옥개받침이 층단을 이룬 것은 전탑의 양식을 따랐다고 하겠다. 상륜부는 양탑이 모두 3층 옥개석 위에 노반석만을 남기고 있을 뿐 다른 부재는 없어졌고, 현재 긴 찰주만이 남아 전한다. 찰주의 높이는 3.9m이나 해체 수리할 때 주조된 찰주의 전체 높이는 5.0m에 달하며 사리장치가 봉안된 3층 탑신까지 연장되어 있다. 해방 후 1959년 우리의 손으로 처음 해체 수리할 때 서탑의 3층 옥신 상면의 사리공에서 창건 당시의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96년에 동탑을 해체수리할 때도 사천왕상이 새겨진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서탑은 2006년부터 3년동안 수리하고 최근 공개되었다.

 

▲동서삼층석탑

   

▲동서삼층석탑

 
    동·서탑에서 나온 사리장치를 분석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서탑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동탑에는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충격적인 추론을 지난 2001년 발표하였다. 
“감은사 동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서탑엔 부처님의 사리가 각각 봉안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추정은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연구소측의 주장. 문무왕은 처음으로 서역식 화장 장례를 도입한 ‘불심 깊은 왕’이었음을 일단 감안하자. 그런데 서탑의 경우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奏樂)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을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됐다. 

 

▲동삼층석탑

 

▲서삼층석탑


   또 서탑엔 ‘봉황’이, 동탑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을 상징하는 ‘용’ 장식이 있다. 7~8세기 유행한 유마경(維摩經)에 따르면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힐은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재가신도의 대표이다. 둔황석굴 제103굴, 제335굴에 그려진 ‘유마경 변상도’를 보면 ‘재가불자의 대표’ 유마힐 거사와 ‘석가모니가 파견한’ 문수보살이 대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벽화그림의 배치도 감은사 동(유마힐)·서(문수보살)탑의 배치와 같고 이분들이 앉아있는 좌대의 가구 배치와 천장의 장식 모양도 동·서탑의 사리함과 비슷하다. 더욱이 동탑 사리기 기단부에는 유마거사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만들었다는 3만2천개의 사자좌를 상징하는 장식물이 있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은 재가불자의 상징인물이 된 ‘유마힐 거사’처럼 추앙받은 게 아닐까. 

 

▲동삼층석탑 

   

▲서삼층석탑


   그러니 죽어서도 그 사리가 호국사찰인 감은사 ‘동탑’ 사리함에 봉안되어 부처님의 사리(서탑)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에 대해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와 문명대 동국대 교수 등은 한 마디로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 일축했다. “왕의 사리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으며 국가기관이 함부로 그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연구소의 발표에 힘을 실어준 이가 원로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 동국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서탑의 사리 1과는 불사리(佛舍利)이고, 동탑에서 발견된 54과의 사리 중 일부는 문무왕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문무왕 사리는 불사리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오히려 불사리의 위의(威義)를 빌려 호국불교의 의미를 되새긴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2008.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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