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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양묘(傳金陽墓)

蔥叟 2008. 11. 12. 08:21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양묘(傳金陽墓)

  

   이 무덤은 신라하대의 제 45대 신무왕과 그의 아버지였던 김균정, 그리고 46대 문성왕을 보좌하면서 3대에 걸쳐서 충성을 다한 김양의 묘로 전하고 있다. 묘는 무열왕릉과 전김인문묘 사이에 있으며, 봉분의 직경은 약 22m 내외이며, 봉분높이는 3.9m이며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전김양묘

 

▲전김양묘

 

   김양은 아주 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42대 흥덕왕이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836년 후사가 없이 죽게 되자 그 사촌 계열에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진다. 이때 김균정과 아들 김우징이 한편이 되고 김제융과 김명이 반대편에 서서 대립하였다. 김양은 이때 김균정의 편에 서게 된다. 이후 김균정, 그의 아들이자 후에 신무와이 되는 김우징, 그리고 문성왕, 이렇게 3대에 걸쳐 충성을 다하게 되는 데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의 9세 손이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하였다. 그 때 제륭의 도당인 김 명, 이 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 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다. 균정이 말했다. “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이에 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시에 이르렀고, 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해를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개성 2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 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양을 평동장군이라 하였다.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 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 이 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 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 금과 이 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4년 정월 19일, 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사녀,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다. 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인데,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다. 당에서 빙문하고 동시에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하였다.


대중 11년 8월 13일에 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중하고,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양전>

 

▲전김양묘

 

▲전김양묘

 

   한편 서라벌에서는 희강왕이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김명이 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44대 민애왕이다. 민애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김우징이 서라벌로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구벌까지 나가서 격전을 벌이다가 패하여 도망치다 모량부 월유택에서 장보고군대에게 붙잡혀 죽는다. 승리한 김우징은 곧바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45대 신무왕이다. 하지만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지 7개월여만에 병사하고 그의 아들이 계승하니 이가 곧 46대 문성왕이다. 문성왕이 아버지와 장보고 사이의 약속을 지키고자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하자 서라벌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장보고는 신분이 미천한 섬사람(海島人)이므로 왕비로 책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장보고의 군사력이 두려웠고 장보고를 없애고자 염장을 청해진으로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고 청해진을 폐쇄해 버렸다. 그후 서남해상은 안정을 잃었고 신라는 점점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처럼 3대에 걸쳐 충성을 다한 김양이 857년 50세의 나이에 죽자 문성왕은 "舒發翰으로 추증하고 賻儀와 殮葬을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陵列에 陪葬토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현재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김양의 장례식은 김유신장군 이후 가장 성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배장묘일 경우 왕릉에 가까울수록 왕의 측근인 법인데 전김양묘는 무열왕릉과 전김인문묘 사이에 있다. 김양의 묘가 무열왕 부자의 무덤 사이에 올 수가 있을까? 만일 김유신묘라면 가능할 것이다.

 

▲전김양묘

 

 

 

<2008.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