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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굴산사터 부도

蔥叟 2008. 10. 13. 08:20

강릉 굴산사터 부도

  

   굴산사터 부도는 화강암으로 건조한 팔각원당형의 일반적 석조부도로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일부에 새로운 수법이 가미되어 주목된다. 높고 널찍한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고 탑신부를 안치하였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지대석은 1석으로 큼직하게 조성하였는데 하면부터 상면까지 8각이다. 8각의 측면에는 각면에 1좌씩 사자상을 비스듬하게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8좌의 사자상들은 머리와 동체, 꼬리부분 등 형태가 모두 달라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상단은 굽형을 이루고 있으며, 상면에는 낮은 각형(角形)과 높은 호형(弧形)의 2단괴임을 마련하여 그 위에 널찍한 괴임대를 받고 있다.
 

▲굴산사터 부도

 

▲굴산사터 부도

 

▲굴산사터 부도

 

   괴임대도 8각이며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이 각출되어 지대석 상면의 괴임대에 놓이도록 되어있고 측면과 상단에 이르는 각 면에는 귀꽃문과 고사리문 등이 유려하게 조각되었다. 상단은 마치 큼직한 8엽의 앙련(仰蓮)으로 이루어진 듯 하며 유려한 판단(瓣端) 사이는 낮아져 내면으로부터 우수가 밖으로 흐르도록 조성되었으며 시문 또한 그러하다. 상면 중심에는 윗 부재를 받기 위한 각형 1단의 괴임이 낮게 각출되었으며, 그 주변으로부터 내곡면과 상단에 이르는 간지(間地)에는 큼직한 연화문을 각 모서리에 1판씩 도합 8판을 돌리고 그 사이사이에 또한 연화문을 조각하고 큼직한 연판 내에는 여러 겹의 고사리문을 장식하여 화려한 내곡면을 이루고 있다. 괴임대 중심에는 2단의 높직한 받침대를 마련하고 하대석을 받고 있는데 하단은 반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상단은 각형이다.

   하대석은 하면에 낮은 8각의 각형받침 1단이 모각되었으며, 측면으로 올라가면서 상단에 이르러는 원형으로 변하였는데 측면 등 전면에 운문과 고사리문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하대석 상면에는 모를 죽인 괴임 1단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으며 이 괴임단 주위에는 상단 사이에 수구와도 같은 홈이 파여져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각 측면 모서리마다 여러 겹의 운문을 3단으로 장식하여 주형을 이루고 그 사이 각 면에는 악상과 공양상 등 1구씩을 가득히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8각이며 하면에 각형 1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측면에는 각 모서리에 큼직한 앙련 1판씩을 조각하여 모두 8판인데 각 판내에는 화문을 가득히 장식하였다. 상단은 굽형으로 이루어졌고 상면에 낮고 높은 3단의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륜부

 

▲하대석

 

▲사자상

 

   탑신석은 8각으로 각 측면에 우주가 표현되었는데 세장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보다 상면이 좁아들어 이른바 배흘림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앞면과 뒷면에 문비형을 마련하고 자물통을 모각하였으며, 다른 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하면에 각형과 호형의 3단 받침을 모각하여 탑신석 위에 놓이게 하였으며, 추녀로부터 처마의 전각에 이르는 넓은 간지에는 낮은 2단의 받침과 8귀퉁이에 이르는 공포가 모각되어 있어 또한 목조건축의 일부를 연상케 하여 주의를 끈다. 낙수면은 상부에서 약간 경사가 급하여 8각의 합각에 우동은 뚜렷하나 전각에 이르러 장식이 없다. 옥개석 정상에는 8각의 굽형으로 이루어진 높직한 괴임대가 있어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앙화와 보주석을 중적하였는데 노반석은 8각이며 측면에 연화문을 이중으로 돌렸고 상단은 굽형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면에 원형의 낮은 괴임 1단을 마련하여 앙화를 얹고 있다. 앙화는 하면에 낮은 원형의 받침을 모각하여 노반석 상면의 원형 괴임대에 놓이게 하였으며 주위에는 큼직한 연화문을 8판 돌리고 판내는 선문으로 장식하였다. 측면은 8귀퉁이 전각마다 귀꽃문이 장식되고 상면 간지에는 고사리문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상단부에 이르면서 보상화문 8판을 돌리고 상단을 굽형으로 조성하여 보주석을 얹었다. 보주석은 하단부에 앙련을 이중으로 돌려 장식하였으며 정상에는 평평하게 괴임대를 마련하여 보주를 얹도록 하였으나 현재 보주는 결실되었다. 굴산사터 부도는 양식상으로 보아 신라말 고려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굴산사의 창건 조사인 범일국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하대석 원석

 

▲하대석 문양

 

▲중대석 비천상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ㆍ정취ㆍ조신’조의 설화들은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 친견에 성공 또는 실패했다든가, 관음보살이 준 보주를 걸승이 결사적으로 지켜냈다든가, 조신이 관음보살의 깨우침으로 망상에서 벗어났다든가 해서 관음보살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오직 범일(梵日)과 정취보살 설화가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관음보살 다음에 정취보살을 만나는데, 이 정취보살이 관음보살의 응현(應現)이라는 설이 있고 보면 이 설화도 결국 관음보살에 관한 것으로 귀착될 수 있지만, 관음보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범일과 정취보살 설화는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아무래도 구별이 된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설화의 요지는 이렇다.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 갔을 때 한 쪽 귀가 없는 사미(沙彌)를 만난다. 그 사미가 범일에게 자신의 고향이 명주(溟洲) 지경 익령현 덕기방이라고 범일과 동향임을 밝히며, 범일이 귀국하면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범일은 중국 각지를 두루 다니다가 귀국한 후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당나라에서 보았던 사미가 나타나 전일의 약속을 일깨우고 범일은 놀라 깨어난다. 범일이 사람들을 데리고 익령 지경에 가서 그 사미의 집을 찾다가 낙산 아래 마을에서 덕기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 여인의 아들과 함께 놀았다는 ‘금빛 나는 아이’를 찾았더니 물 속에 한쪽 귀가 떨어진 돌부처가 있었는데 이가 곧 정취보살의 상이었다. 범일은 세 칸 전각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일연은 정취보살 설화 바로 뒤에 주석을 붙이고 있는데, “고본(古本) 기록에는 범일의 사연이 의상, 원효의 사연보다 앞서 나와 있지만 의상, 원효의 일이 범일의 일보다 170년이나 앞서므로 글의 순서를 바꾸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범일 당시의 낙산사가 창건된 지 170년이나 되어 절이 퇴락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범일이 정취보살상을 찾아내 정취전을 지어 모셨다는 설화가 낙산사 중창을 말해 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이 아마도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에 범일이 등장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삼국유사』가 낙산사와 관련된 것 말고 범일의 활동에 관해 언급한 것이 있다면, 범일이 정취보살을 찾기에 앞서 “중국에서 돌아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교하였다”라는 한 문장 뿐이다. 얼핏 흘려듣고 넘길 수도 있는 이 문장 하나에는 그러나 생각 밖으로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주지하다시피 범일은 신라 말 명주 굴산사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꼽히는 사굴산파를 개창한 고승이다. 명주 태생인 범일은 명주 도독을 지낸 김술원의 손자로, 20세에 경주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하겠다고 결심하여 831년 왕자 김의종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당나라에 도착한 후에는 구도행각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찾던 중에 마조(馬祖) 문하였던 염관(鹽官) 제안(齊安)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의 대화가 『조당집(祖堂集)』에 전해지고 있다.
  
  “어디에서 왔는가?”
  “동국(東國)에서 왔습니다.”
  “바다를 건너왔는가? 육지로 걸어왔는가?”
  “바다도 건너지 않고 육지로 걷지도 않고 왔습니다.”
  “두 길을 밟지 않고 어떻게 왔는가?”
  “해와 달이 동과 서에 있으니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국의 보살이로다!”
  
   이런 문답 끝에 범일이 물었다.
  “어찌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까?”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그저 더럽히지 마라. 부처란 견해, 보살이란 견해를 짓지 마라. 평상심이 곧 도이니라”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이에 범일은 크게 깨우쳐 6년 동안 제안선사 밑에서 수련한 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847년에 귀국하였다. 범일이 경주 인근에서 수도하다가 851년 회덕 백달산에 머물던 중 명주 도독 김공(金公)이 굴산사에 주석하며 법을 펴줄 것을 청하여, 범일은 굴산사로 가서 사굴산문을 개창하게 된다.
  
    범일의 고명이 널리 알려지면서 871년에 경문왕이, 880년에 헌강왕이, 그리고 887년에 정강왕이 각각 사신을 보내어 국사(國師)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범일은 응하지 않고 굴산사에 머무르며 40여 년을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개청(開淸), 행적(行寂) 등 10성(十聖) 제자가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순천 정혜사의 혜소(慧炤)와 그 제자 단성 단속사의 탄연(坦然), 그리고 고려 중기에 선(禪)을 크게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있다. 

 

▲중대석 비천상

 

▲중대석 비천상

 

▲상대석 앙련

 

   범일의 법통은 오늘날 불교의 정맥으로 연승(連承)되고 있으며 적어도 영동지방에 관한 한 그의 업적은 의상, 원효보다도 위대하였다. 범일과 그의 문도들은 굴산사를 본종지(本宗旨)의 주본사(主本寺)로 하면서 전국적으로 사굴산파 선문을 전교하였다. 특히 영동지방 일원에는 그의 행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삼척의 삼화사, 강릉의 신복사, 명주군의 보현사, 양양군의 낙산사, 평창군의 월정사 등은 범일 또는 그의 문도들에 의해 개창 또는 중창된 사찰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범일의 행적은 설화의 형식으로 영동지방에 구전되고 있으며, 특히 강릉 지방에는 신격적(神格的) 존재로 승화되어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봉사(奉祀)되고 있다. 음력 5월 5일의 강릉단오제도 이와 유관한 전설을 모체로 전승되고 있다.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상대석 앙련

 

 

 

<2008.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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