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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신복사터 삼층석탑

蔥叟 2008. 10. 14. 08:04

강릉 신복사터 삼층석탑

 

   신복사는 850년(문성왕 12)경에 범일국사(梵一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임영지 臨瀛志〉에 신라말 어떤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신 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고승이 되어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신복사지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과 신복사지3층석탑(보물 제87호)만이 남아 있다. 1936, 1937년의 발굴조사에서 '신복'(神福)이라고 씌어진 기왓장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이명으로 한때 심복사(尋福寺), 신복사(神伏寺)라고 불렀다.    

 

▲신복사터 삼층석탑

 

▲탑신부

 

▲탑신부

 

   연하문기대석 위에 중층 이성 기단으로 된 점이 특징으로 얼른 보기에는 7층탑으로 보이나 옥신과 옥개석은 한개로 된것도 있고 여러개의 돌로 된것도 있으며 옥개석 받침이 3단으로 되었다. 높이 약4,5m되는 이 탑은 상륜부는 5층으로 4면에 구멍이 있고 그 위에 둥근 돌을 두개 올려 놓았다. 이 탑은 형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균형이 잡혔고 안정감이 있는 탑이다. 이 탑은 강릉에서 단 하나의 탑으로 이 마을을 탑골이라 한다.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이 아이를 내다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다.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단부

 

▲상륜부

 

▲석불좌상과 삼층석탑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보살석상(보물 제84호)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월정사팔각9층석탑(국보 제48호)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신복사터 전경

 

 

 

<2008.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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