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북촌댁(北村宅)
조선 중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류사춘(柳師春)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건립한 것이 이 집의 시초이다. 그후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낸 그의 증손인 석호(石濠)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의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체의 대문간축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다. 안채에는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겹으로 구성한 안방과 안대청이 있다. 안방은 독특한 田자형의 4칸방으로 앞의 2개방은 평소 거처하는 곳이고 뒤의 2개방은 수장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안방 왼쪽에 3칸이 넘는 큰 규모의 부엌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는 은퇴한 바깥주인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대문간채
▲북촌댁 전경
▲북촌댁 전경
작은사랑은 수신와사랑(須愼窩舍廊)이라 이름지었다. '수신와'는 화경당을 중창한 류도성의 별호이다. '수신'은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하면서 모름지기 자기를 낮추고 삼간다는 뜻을 지녔다. 수신은 화경당의 정신이다. 1칸 방, 1칸 대청, 2칸 퇴로 이루어져 있다. 방 뒤에는 벽장을 마련했으며, 방과 청 사이에는 필요에 따라 완전 개방할 수 있는 4분합 들문을 달았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납도리 5량으로 하였으며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고 문은 방은 띠살창호, 대청에는 띠살들어 열개문과 울거미널문을 달았다. 손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사랑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방 오른쪽에 어린 손자가 안채의 어머니가 보고싶을 때 중문을 통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조그만 문을 달아 배려했음을 엿볼 수 있다. 수신와 현판은 어렵게 사는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낮추어 살라는 화경당 북촌의 정신으로서 어릴 때부터 방을 드나들 때 마다 쳐다보고 일께우라는 어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글씨는 북촌유거를 쓴 해사 김성근 글씨이다.
▲북촌댁 전경
▲작은사랑과 중간사랑
▲수신와 편액
2칸방, 1칸 대청, 3칸 퇴, 대청 오른편으로 쪽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둘렀다. 2칸 방 뒤에는 벽장과 안채로 통하는 은폐된 통로를 두고 있으며, 대청 뒤에는 1칸 크기의 서고와 목판합을 두었다. 서고 외벽에는 위상의 고려와 도난방지용으로 설치했음직한 와편으로 기하문양을 베풀었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 위에는 2칸 크기의 다락을 두었으며, 방과 청 사이에는 필요에 따라 완전 개방할 수 있는 4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납도리 5량으로 하였으며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고 문은 방과 다락은 띠살창호, 대청과 쪽마루에는 띠살들어열개문을 두었다.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사랑이며 화경당 편액은 정조, 순조조에 초계문신과 예조, 호조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서 柳이佐)공의 당호로서 가족과 친족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며 충효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겠다. 한호 석봉글씨이다.
▲화경당 편액
▲북촌유거 사랑
▲북촌유거 사랑
▲북촌유거 사랑
북촌유거 사랑(北村幽居 舍廊)으로 불리는 큰사랑은 정면 7칸, 측면 3칸 건물로써 2칸 방 2개, 1칸방 2개, 4칸 대청 , 3칸 누마루, 3칸 규모의 정지와 그 위에 같은 크기의 다락, 그리고 5칸의 퇴, 5쪽의 쪽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굴도리 5량으로 하였으며, 집 외부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기둥 상부 보아지 안쪽을 초각하고, 장여 밑에 소로 받침을 두고, 문은 띠살창호와 울거미널문을 혼용하였다. 가장 웃어른인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던 사랑으로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3대풍광인 정면 동쪽으로는 하회의 주산인 화산(花山)을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을,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방 사이의 미닫이문과 방과 청사이의 5분합 비대칭 들어열개문을 올릴 경우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사랑 뒤에는 하회동네를 감싸고 흘러가는 낙동강의 형상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수령 약 300여년의 한국 소나무 한 그루가 그 멋을 더하고 있다. 북촌유거 편액은 철종때의 명필인 해사 김성근의 글씨로 북총이 기품있게 기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북촌유거 편액
▲안채
안채는 둘레 3.5자(약 1m), 높이 13자(약 4m)의 두리기둥과 둘레 6.5자(약 2m), 길이 23자(약7m)의 굵고 긴 대들보를 얹은 장대한 규모로 지어져 있다. 전체 평면의 모양은 口자형으로 되어 중앙에 마당을 두고 전면에 부엌, 안방, 대청, 고방, 윗상방, 툇마루, 아랫상방을 오른쪽엔 큰 사랑으로 통하는 중문, 왼쪽엔 아랫광, 뒤주, 문간방으로 배치되어있다. 부엌은 대갓집답게 3칸 반의 큰 규모이며 그 위에 같은 크기의 다락을 두었다. 독특한 田자형의 안주인이 거처하던 4칸 규모의 안방은 앞줄 좌(아랫방), 우(윗방) 2방은 일상기거와 접객이 이루어지며, 뒷줄 좌(골방), 우(찬방) 2칸은 옷가지와 안살림을 수장하던 곳이다. 4칸 대청, 1칸 고방, 며느리가 쓰던 2칸 윗살방, 옆뜰로 통하는 반칸의 툇마루, 노모가 기거하던 1칸 아랫상방을 배치하였으며 안방, 대청, 아랫상방 앞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안채
▲안채
▲안채
▲안채
오른쪽엔 큰 사랑으로 통하는 2칸 중문과 그 위에 같은 크기의 다락을 두었으며 왼쪽으론 찬거리를 두던 1칸 아랫광과 그 위에 다락을, 하회에서 유일한 1칸 뒤주, 측근에서 심부름하던 아랫사람이 쓰던 1칸 문간방이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굴도리 3량으로 하였으며 전면 기둥 3개응 두리기둥으로 하였고 기둥상부 보아지 안쪽을 사면으로 처리하고 소로받침을 두어 장여를 받치고 있다. 창호는 방에는 띠살창호를, 부엌, 대청뒷면, 아랫광문, 다락문은 판장문으로 하였고 고방, �마루문은 올거미널문을 썼다. 또한 田자형 안방엔 홀문띠살창호, 양문띠살창호, 겹양문띠살창호의 다양한 문으로 변화를 구하였고 방 사이의 구분도 2면은 미닫이로 1면은 큰 장지문으로 도 한 면은 비워두어 안주인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안채에는 평면상으로 사랑채와 한 채로 연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구조에 있어 월등히 격이 높다. 또한 대가 위상을 고려한 듯 팔작지붕 양족 큰 방공합각벽에 강회와 와편으로 빗살문양을 베풀었다.
▲안채
▲쪽문
<2008.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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